2025년 1월 26일 일요일

2007 서정길 목사 선교현장

뉴스 고대 과학 생활 오피니언 기독대학 크리스천 잡스 동영상 pdf 보기 더보기 고대 한인교회 입력 2007년 7월 12일 오후 1시 24분(PDT)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후레스노한인장로교회는 산밖으로 나가서 단기선교와 함께했습니다. 기독일보 지재일 기자 ( jaeil@chdaily.com ) 글자기 + - 후레스노한인장로교회(담임 서정길 목사)는 지난 2일부터 7일까지 밖에 나가서 7시간 정도 남쪽에 있는 산밖으로(San Quintin)으로 짧은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교회가 단독으로 단기선교를 찾아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참가는 한어권 성인 4명과 영어권 가구 8명, 후레스노한인장로교회 성도 12명과 타 교회 성 2명, 현지에서 4명을 대상으로 가이드를 했습니다. 단기선교단체들은 군데군데를 바로 넘어서는 정도의 규모의 큰 도시인 티와나(티후아나)에서 알코올 중독자 및 전과자들이 모인 전체 센터 교회를 구별하고, 관련자 약 2백여 명과 함께 하나님께 대피를 당했습니다. 이후 빵과 떡, 과일을 따르거나 아이들에게 연필을 선물로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단기선교 팀의 외부인 산밖에서 4곳의 현지 원주민 교회를 소수민족으로 선교를 진행했습니다. 7월 3일(화)에는 산타페교회(San ta fe church, 벤자민 목사), 4일은 에벤에셀 교회(Ebenezer church, 볼트 목사), 5일은 열림교회(lglesiaa Puerta Abierta, 이스라엘 목사)를 순회했다. 농장 농장에서 작업을 수행하고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각 교회와 지역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 여름성경학교(VBS)를 가졌는데, 후레스노한인장로교회의 교도인들은 영어로 찬양하고, 현지 통역관을 통해 찬양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교제를 주셨습니다. 다른 방에서는 단기선교에 투입된 치과의사 정광순의 인도 치과로 치과치료를 실시했습니다. 밤에는 성서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마지막 선교지인 경우에는 갓난 아이에게 받기를 먹이는 것은 어머니들, 병들어 있는 아내 등 노약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적절한 약품 전달과 1백 명의 여성 아이들에게 VBS를 처리했으며, 미리 준비해 간 어린이 의류를 전달했습니다. 서정길 목사는 "평소 치과의사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 소수자들에게 유일하게 알리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단기선교사 중 교회에서 4백 여성 어린이들이 VBS에 참여했습니다. 소수의 인도인들이 찬양, 말씀, 전시 등을 통해 부활절뿐 아니라 부활절까지. "라고 말했다. 단기 학용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정길 목사, 박병락 장로, 김중기 장로, 김정숙A집사, Leo Kim, Susan Lee, Geoge Park, Camille Fairbanks, Esther Kang, Albert Lee, Daniel Nam, Daniel Choi(총12명). © 2020 Christianitydaily.com 모든 권리 보유. 허가 없이 복제하지 마십시오.

2022년 6월 28일 화요일

 기독교 대하소설


제1편

1장  1953년 9월

“빨리와~~”  “같이가자아~~” 나는 뛰뚱뛰뚱 걸음을 걸으며 동네 친구를 따라간다. 대문을 넘어서 왼쪽으로 흙담을 어루만지며 달려가듯 쫓아간다. 담벼락이 끝나는 자리에 왼쪽 신발이 벗겨질듯 벗겨질듯 하여 발가락을 오무리지만 걸음은 더 절름발이 마냥 균형없이 내 딧는다. 형들과 친구를 따라가야하니  내 발걸음은 매우 바쁘며 동시에 마음이 급하고 하여 마음의 속도와 다리의 속도와 발바닥이 내 딛는 바란스는 깨어지게 마련이다. 간신히 좁은 나무다리를 통과하게 되는데 ‘앗자차’ 발이 약간 젖어있는 나무위에 c자 형으로 미끄러져 푹, 한쪽발이 빠지고 만다. 

1953년 9월의 가을은 멀리는 초록색 북평 들판과 누런 보리밭 사이를 달리고 있었지만 새털구름으로 수놓은듯한 하늘이 펼쳐저 있기에 짙은 풀냄새로 어린나를 감싸기에는 충분하다. 내가 그들을 따르지 못한 이유는 소위말하는 내가 가장 년소자이기 때문이었다.  48년 출생으로  이제 막 5살이 되었기에 동네 형들과 친구들만 따라나섰기 때문이다. 오늘이 주일인지 일요일인지 알바 아니다. 다만 친구들이 달려가니 무슨 좋은 일이려니 여겼고  따라가던 걸음이니 그냥 계속 따라 내딛는 발걸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따라가야하는 일은 내가 지금 이루어야할 중요한 순간이 아닐수 없다. 


기독교 대하소설


제1편

   2장 1955년 2월

“이게 뭐람, 왜 내이름은 부르지 않는거야?”

나는 7살에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북평에서 정라진으로 이사를 하게된다. 학교 입학식이 진행되는데 운동장에 모든 학생들이 질서없이 모여있고 그 상태에서 선생님이 한 아이씩 불러 줄을 세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의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나와 함께 모여있던 아이들은 모두 오른쪽에 줄을 서기위해 하나하나 빠져 나가는데,,결국 나만 덩그렇게 혼자 남아있는 신세가 되었다. 불안, 초조, 그리고 고독이 밀려온다. 그 넓은 운동장에 하늘아래 땅위에 남겨진다. 이유는 다른 곳에서 이사온 학생이었기 때문이었고 나는 얼마후 수속이 끝나고 반 배치를 받은 것이다. 북평에서 정라진으로 전학온, 다시 말하면 두번 학교 입학이 이루어진 학생이 된 셈이다.

 

기독교 대하소설


제1편

  3장 1956년 3월

“할아버지 왜 찢었어?” “너무 어두워서 찢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황해도에서 처음 개신교 ‘소래교회’ 를 창설한 서상륜 씨와 이름이 비슷하다. 서. 이시다. 내가 개신교인이 된 이후에는 줄곳  ‘아마도 서로 상관이 있으리라’ 고 늘 생각하며 살았다. 위키백과에서는 이렇게 기록 되었다.

그의 동생 서경조 와 서상륜 은 황해도 장연구 대구면 송천리의 소래마을의 한 초가집 에서 1883년 5월 16일 한국교회사 처음으로 한국인이 스스로 개신교 교회를 세웠다. 그후 1895년 8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896년 8칸을 증축하였다. 

정라진으로 이사 가보니 친척들이 두루 그 근방에 많이 살고 있었다. 나의 형님보다 5살 위인  삼촌은 같이 한집에서 살고 있고 아랫 동네엔 또 다른 삼촌과 그의 가족들,사촌, 5촌 등 많이 살고  있었고 그 이후 자손은 많이 번성하여 지금도 이름이 비슷하면 나의 친척이려니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정라진 하동에 바닷가를 등진 언덕에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나는 다행이 바다가 바로 보이는 언덕에 놓여져 있는 집이다. 낮이면 태양을 받은 바다의 반짝임이 눈이 부실 정도로 우리집을 정면으로 비추어 주었고 밤이면 통통 거리며 소리내는 고기잡이 배들의 전깃불 행열을 볼수 있었다.  불을 켜 놓아야 오징어가 가까이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 크지 않은 기와집에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그리고 부모님과 형, 태어난 동생 그리고 내가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다.  

할아버지는 키가 크셨고 수염이 길으셨다. 늘 소주를 즐겨 마시는데 소주 사오는 심부름은 대체로 나의 몫이었다. 나는 심부름을 너무 잘했기에 한번 어머니가 “영길아 너는 이 밤이 점방에 가기 싫지도 않니”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쓰시는 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 어느날 전등불이 너무 어두워서 좀 밝히고 싶었다.  어린 나에게 그 어두운 불을 밝히기는 불가능하였고 할수있는 일은 전등을 바짝 내자리에 당겨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니 나에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등 위에는 소켓이 있는데 그 소켓 위에다가 빳빳한 곽대기로 둥글게 천정으로 올라가는 불빛을 막는 것이다. 나는 좀 빳빳한 곽대기를 구해 위질 해서 멋지게 상단을 커버하고 아래로만 불이 비추게 하여 내 연구한 것이 현실에 이르르게 되었다.  흐릿한 전구 (electric lamp) 였지만 나의 아이디어가 대단했다고 스스로 칭찬 하면서 실습으로 작업중에 둘러보니 위에는 캄캄하고 곽대기 아래는 환해서 글자도 잘 보이곤 하였다. 그런데 그전구커버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이리저리 애를 쓰니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달라고 하신다. 그래서 드렸더니 사정없이 그 두꺼운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쓰레기 통에 넣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할아버지, 왜 찢었어?” “너무 어두워서 찢었다”   

할아버지는 방 전체가 환해야 한다고 여겼고 나는 천정은 어두워도 아래쪽이 환 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다. 달랐다. 생각이 아주 달랐다. 

할아버지는 어부였다. 그러나 배를 소유한 어부가 아니라 큰 배를 가진 소유주에게 소속된 어부로 아마도 할아버지는 선주에게 잡은 고기 일부를 배 사용갑으로 떼어주고 가져와서 그것을 팔아 생계를 꾸렸으리라고 추측이 된다.. 그래서 그때에도 정라진에서 고기잡이 배 한대만 가지고 있으면 괜찮게 사는 집이라고 생각했다.  고기는 대체로 오징어가 많았고 가끔은 꽁치, 양미리를 잡아 오시곤 했다.  

그리고 내 눈에 매우 신기한 일들이 가끔 펼쳐지곤 하였는데 할아버지는 배에서 내려와서는 마당에 그물을 펼쳐놓고 그물깁기를 잘 하신다. 실이 달린 실패를 그물 구멍 속으로 집어 넣었다. 뺏다 하면서 그물을 깁는 것을 보노라면 ‘어떻게 저렇게도 기술이 좋으며 속도가 빠를수 있을까?’ 의아해하며 구경한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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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4장 1956년 5월

“히야~~ 이제 그만가라. 내 안 덤빌께 같이가자”

형은 1944년으로 나보다 4살 위다. 우린 별로 싸우지 않고 지내는 편이다..그런데 어쩌다 싸움을 하면 늘 내가 이겼고 그 싸움도 대체로 내가 먼저 시동을 걸어서 결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형은 대체로 지고만다.  형은 순하고 나는 좀 악질(?)형이다. 어느날도 나는 형에게 시비를 거는데 형은 참고 또 참고 하다가 순간 나를 앞마당에 그냥 넘어 뜨린다. 그리고 내 배위에 올라타서 내 면상을 향하여 주먹을 불끈쥐고 내려치려 하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도망가기 시작한다. 우리집은 산 중턱에 있기에 도망은 당연히 산으로 올라가게 되어있다. 나는 집요하게 따라간다. 오르고 또 오르고 굽은 흙길을 돌고 또 돌고 나는 형을 추격하고 형은 도망을 계속 가고 있다. 얼마동안 그랬을까? 나는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형을 놓칠수가 없다는 신념으로 헐떡이며 가는데 아~~ 날이 점점 어두워 지기 시작한다. 이젠 형하고 나는 거리가 더 멀어졌고 날은 어두워서 가물가물 형의 형체가 보일까 말까이다. 있는 힘을 다해서 나는 달음질로 따라 갔지만 역부족이었다. 무섭고, 외롭고, 불안하였기에 최선을 다해 소리 지를수 밖에 없다. “히야, 내 이제 히야 안 잡을께, 안 덤벼들께, 그만 올라가라. 같이 집으로 내려가자!” 똑같은 소리를 세번이상 지르니 형의 멈추어 섰다. 눈물이 핑 돈다. 둘은 만나서 손을 잡고 아무말 한마디 하지않고 투덜 투덜 걸음으로 긴 산 하향길을 내려왔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손만 꽉 잡은채 집에 도착했다. 나는 형님이 주님 품에 돌아가실때 까지 그에게 ‘평화’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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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5장  1957년 11월

 “영길아 너 교회가니?”

 “네, 가요” 

 “왜?” 

 “재미 있어서요”

 “교회는 재미로 다니는게 아니라 예수 믿으러 가는거다”

우리집에서 뒷산을 넘으면 오두막 집이 한 두채 있다. 거기에서 걸어 산을 넘어 우리집에 와서 일하는 청년이 있었다. 이름은 김원학, 아마 그때 그의 나이가 19세 쯤 되어 보이는데, 처음 나를 만나자 마자 질문한 내용이다.

나는 그때부터 교회는 재미로 다니는게 아니고 예수 믿으로 다닌다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담아 두었다.  알고보니 그는 정라 감리교회 주일학교 교사였고  그 형과 가끔씩 같이 교회가곤 하였다. 나중에 그 청년은 군대에 가고, 군대생활 시작하면서 겪은 많은 글들을 빼곡히 적어 4장이나 되는 분량을 내게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군대생활의 이모저모와 아울러 인생관 등 고상하고 거창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는데 내용들을 읽어보긴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곤 하였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인생살이가 그리 녹록치 않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살아 가라는 뜻이었다.  

나의 교회생활 처음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정라 감리교회였다. 미국에서 한국에 선교할때 장로교, 감리교 등으로 지역 분산을 할때 강원도 동해쪽은 감리교 선교사님들이 온것 같다. 그래서 그 감리교회가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였다. 

교회- 삼척동부감리교회 

입교-1957년 11월26일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12:3-

그림설명<1977년 나의 형님 서정웅 화가가 세례 받은 후 그린 예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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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6장  1958년 5월



“너, 헤엄 칠줄 알아? 몰라?” “헤엄 못쳐요”

이웃에 사촌이 살았다. 이름은 “서정민”, 그가 함께 부두에 놀러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부두가에 배를 정박할 정도이니 바다 깊이는 상당하였고 정확한 깊이를 몰랐다.  그런데다가  나는 수영을 아직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의 놀이는 한 배에서 다른배로 옮겨 타는 놀이였다. 재미있게 으례이 앞장서는 사촌을 따라 몇개의 배를 이어서 옮겨 타니 매우 신났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네번째 배에서 다섯번째 배로 발을 옮기려 하는데 공간이 너무 넓었고 배는 모두다 약간씩 움직였기에 공간이 좁았다가 넓었다가 하면서 반복한다. 사촌은 쉽게 덥썩 건넜다. 이어서 내가 뛰려 하는데 갑자기 공간이 더 넓어 지는 듯 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어린 나이에 자존심, 뭐 그런것이 발동했고  나는  머뭇머뭇 거리다가 건너 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뛰기 직전에 벌써 못 건너는게 아닌가? 하는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껑충” 뛰었는데  급기야는 오늘발이 내가 있는 장소에서 다음 배에 다다를 수 없었고 헤엄을 아직 배워보지 못한 나는  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깊은 물이고 나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조그마한 웃방에 갇혀서 회초리를 든 아버지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몸은 젖었고, 무서운 얼굴을 한 아버지는 용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훈계는 날카로왔다. 

 “너, 헤엄 칠줄 알아? 몰라?”

 “헤엄 못쳐요”

“그런데 왜 부두가에 겁없이 갔었어? 왜?”

 옛날 어른들의 징계는 엄중하였고 초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는 매우 강도 높은 맹훈련을 받은 셈이다.  방안에 누가 들어와서 말리지 못하게 방문을 꼭 잠구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내가 집에서 독립할 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서 바닷가에 나가는 것이 일체 금지 되었고 얼마후 아버지는 나를 강가에 데리고 가서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개구리 헤엄, 송장헤엄 등등을 익혀서 아직 그 실력으로 Gym 수영장에서 수영으로 몸을 푼다.   


기독교 대하소설


제1편

7장  1958년 9월


 “선생님, 호랑이가 나왔다고 하는 토굴을 지날때 무서워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 응,, 그래, 좋은 방법이 있다. 그 앞을 지날때 오른손을 들고 걸어가라. 그리하면 예수님이 너를 붙잡아 줄테니”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내가 우리 가문에서는 처음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의 동생들, 형 그리고 부모님 순으로 모두 믿게 되어서 부족하였지만 나에게 아브라함의 역할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8살때에 혼자 약 30분(성인걸음으로는 20분) 걸어서 하동에서 상동에 있는 교회에 다니곤 했다. 주일예배는 그나마 그리 어렵지 않게 잘 걸어서 다녔다. 그런데 어린이 예배는 없었을 터인데 어른 저녁예배에도 혼자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두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밤에 걸을때 어디선가 나는 ‘부스럭’ 소리요 또 다른 하나는 무서운 토굴을 지나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가는길에서 매우 힘든 과정이었으나 그 힘든과정을 잘 이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

첫째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나는데 내가 걸어가면 반드시 들리는 소리였다. 특히 밤에 교회 갈때에는 꼭 귀신이 내 뒤를 따라오는 것과 같았다. 나중에 시간이 좀 지나서 ‘부스럭 부스럭’ 소리에도 나는 겁내지 않고 자신있게 걸을수 있었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그 소리는 내가 입은 골덴바지가 새옷이어서 내가 걸을때 서로 부딪치는 소리였었다.    

둘째 우리동네에는 고깃잡이 배가 안전하기를 비는 서낭당이 있었다. 그 앞에는 토굴이 있었고 나는 그리로 지나가야만 교회에 갈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그 토굴에서는 호랑이가 나왔던 적이 있다는 낭설(?)을 믿든 믿지 않든 그 앞을 지나기가 무서웠다. 물론 둘러 갈만한 다른 길은 전혀없었고 오직 그길만 내가 통과해야할 길이었다. 두려움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교회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였다고 믿고 있었고 교회가면 그렇게 마음이 즐겁고 평안 하였기에 그 일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급기야 나는 교회가서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하동에 호랑이가 나왔다고 하는 토굴을 지날때 무서워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때 선생님은 “아~~, 그렇구나 응, 좋은 방법이 있다. 그 앞을 지날때 오른손을 들고 걸어가라. 그리하면 예수님이 너를 붙잡아 줄테니”  나는 어렸기에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그리로 지날때에는 반드시 오른손을 번쩍 들고 지나갔다. 그렇게 하니 놀랍게도 두려움과 무서움이 깨끗이 사라지고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무사히 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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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8장  1958년 10월

“쓱삭 쓱삭, 톱질하세 톱질하세, 앗! 보물이다. 보물,,,”

정라진 우리학교가  모범 국민학교(초등학교)로 지정되어서 전 학교가 선생님으로 부터 학생들까지 매우 분주 하였다. 밖으로는 운동장을 깨끗이 정리하고 안으로는 각 반마다 교과과정을 정리하며 특별히 뭔가를 보여 줄만한 이벤트를 찾기에 매우 부산하였다. 우리 3학년반도 거기에 준해서 특별한 수업내용을 준비하는 중 “활동그림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나는 평소 읽기를 좋아했었지만 어나운서로 발탁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자랑스럽고 놀라운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우리반 담임 선생님이 학교안에 선생님중에 스토리를 결정하고 그림을 그릴수 있는 우수한 한 여자 선생님을 정한후 나를 그 선생님과 연결해 주었다.  

방과를 끝나고 선생님의 퇴근을 기다렸다가 함께 선생님 집으로 갔다. 나도 그랬고 그 선생님의 집도 역시 하동에 있었다. 퇴근해서 집에 온 선생님은 “잠시 기다려라” 라는 말 한마디 후에 집에서 일상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큰 방에 두루마리 용지를 준비해서 흥부와 놀부 그림을 파노라마 처럼 그려 나간다. 비록 수채화이지만 아주 실감나는 그림들을 그린후 뒷면에다 그 그림의 내용을 적어 나간다. 약 25개의 그림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앞에는 그림 뒷면에는 내용이 담긴 두루마리는 마치 고대 성경 사본과 같이 무게과 볼품이 있었다.  집에서 그 내용을 셀수도 없을만큼 많이 읽고 돌리고 읽고 돌리고 하여 강원도 도 교육위원회에서 탐방오는 그날에 발표시간을 가진다. 

아이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고 나는 앞에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탁자 쪽으로 올라가서 1페이지 부터 읽어 내려간다. 물론 그림은 아이들 볼수있게 하고 글을 나만 볼수 있게 한후 돌리면서 읽는다.  밥 얻어 먹으려고 흥부가 놀부집에 갔다가 형수가 주걱으로 뺨을 때리니 돌아서서 울면서 얼굴에 붙은 밥 몇알을 떼어서 입에 넣는 아주 드라마틱한 이 내용을 시작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간다.  마침 그때 교실 문이 스스르 열리더니 담임선생님은 옆에 서있고 학교 교감 선생님이 교육위원회 선생님들을 세분 모시고 우리 3학년 2반 교실에 나타난다. 나는 생각보다는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신났고 또 원고에 집중해야 하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며 멋지게 발표했다.  

  “쓱삭 쓱삭, 톱질하세 톱질하세, 앗! 보물이다. 보물,,,”

아이들은 쥐죽은 듯 조용히, 그러나 흥미있게 듣고 보았고 교육 위원 선생님들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빙그레 웃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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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9장  1959년 3월 -초등 4-

 “두다닥 딱,  두다닥 딱” 

“크기가 작은 악기라고 절대로 무시하면 안된다.~~”

학교에서 밴드부가 시작되었다. 나는 자원해서 교실로 찾아갔고 나에게는 작은 북 한개가 배당 되었다. 내가 맡은 작은 북 이외에 큰북, 챔버린, 트라이 앵글, 오보에, 손풍금 등등,, 뭐 겨우 그정도였지만 이름하여 우리학교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밴드부인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는 북치는 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생각하면서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칠판에 악보를 보고 친다. 하나, 둘, 셋,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그리고 두손을 같이 한번, 이렇게 치면 3박자가 완성된다.  이것이 왈츠를 뒷받침하는 좋은 반주법이다. 또 4/4 박자는 ‘두다닥 딱’ 두다닥 딱’ 하며 두들겨 주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연습중에 불만이 생겼다. 나의 사촌 정민이가 가진 악기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이다. 그는 제일 뒷자리에 서 있었고 그의 손에 잡은 것은 챔벌린 이다. 그는 나보다 체격이 좀 크기에 그에게 적당한 악기라고 생각했지만 소리가 엄청나게 컷고 나의 소북은 그냥 두다닥 두다닥 하고 작은 소리를 낼 뿐이다. 챔벌린은 “쨍~~~” 하고 한번 치면 온 교실이 날아갈것 같이 유리창이 후들후들 거릴 정도이다. 참 멋지고 웅장해 보였다. 

 잠시 휴식 시간에 나는 지도선생님 한테 불만을 토로했다. 

“선생님, 큰북도 있고 챔벌린도 있는데 왜 나에게는 이렇게 작은 북을 맡겼습니까? 쳐도 큰북과 챔벌린 소리에 뭍혀서 재미가 없어요. 좀 소리 크게 나는 것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서슴치 않고 “손에 스틱을 놓고 날 따라와 봐!” 라고 명령반, 권면반이다.  나는 갑자기 오라고 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약간 겁을 집어 먹으면서 따라가니 나를 교실 문밖으로 이끌어 가고 그 교실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세워둔다. 그리고 선생님은 다시 가서 아이들에게 모두 칠판에 그려진 악보대로 합주 하라고 지시한후 다시 나에게 빠르게 다가와서 “한번 지금 저 합주를 들어봐, 친구가 치고있는 소북 소리가 들리나 안들리나” 그래서 자세히 들어보니 놀라운 현상을 깨달았다. 모든 악기중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북 소리가 대북과 챔벌린 울림의 사이사이에 아주 아름답게 나의 귀를 때렸다. “두다닥 딱,  두다닥 딱” 

“크기가 작은 악기라고 절대로 무시하면 안된다.  그 소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울리는 소리이고 더 나아가 그 소리가 없으면 절대로 합주가 불가능 하다” 는 선생님의 교훈이 아직도 귀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작은 소리도 엄청 아름답구나’ 내 마음에 담아 놓은채 살다보니 그것이 나의 말 표현과 성품까지도 이끌어 가는 힘이 되었다.  

그 누가 이야기 했던가? “작은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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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10장  1959년 3월 -초등 4-

“너, 일어나 뒤에 벽에 붙어서서 팔을 위로 올려!”

 “괜찮아, 학교에서 또 하나 사 줄 거야~~”

또 초등 4학년 학교 밴드부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모든 악기들의 소리가 합해서 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일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작은 오케스트라(?)이니까 그렇다. 그날도 다른날과 마찬가지로 월츠곡이라 일컷는 3박자 연습이다.  한참 연습하는 중에 또 다른 소북을 맡은 친구가 무슨일인지 모르지만 그만 스틱으로 북에다가 구멍을 내고 말았다. 약간의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피식하면서 더 이상 북을 칠수 없었고 모든 연습은 중단되었다. 

“너, 일어나 뒤에 벽에 붙어서서 팔을 위로 올려!”

찢어진 북을 본 선생님은 속이 상해서 그를 그냥두지 않고 벌을 세우는 것이다. 

다시 선생님은 그아이가 벌 서 있는 동안 그대로 지도를 하였다. 모두 열심히 칠판에 그려놓은 악보를 보고 자기가 맡은 부분에 소리를 낸다. “둥둥, 삑삑, 챙챙, 두다닥 두다닥, 아직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처럼 잘하지는 못했어도 듣기 좋았고 멋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한참 나를 포함한 모든 밴드부원들이 “뻐꾸기 월츠”를 열심히 합주 하는데,,,아 이럴수가,, 나는 푹 소리와 함께 소북에 스틱으로 뚫었고 결국 구멍을 내고 말았다.  조금전에 소북에 구멍을 뚫어버린 친구가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고 지금도 기합을 받고 있는 중이므로 나는 혼이 빠져 나가는 줄 알았다.  

합주는 물론 중단 되었고 선생님과 아이들은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다. 5초,, 7초 잠시 시간이 흘렀다. 나의 이마에서는 진땀이 흘러내려 입술에 흘러 입으로 들어가니 짭짤한 땀이 진땀인지 더위에 의한 땀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두근반 세근반 가슴이 꿍당꿍당 하는데,,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괜찮아, 학교에서 또 하나 사 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같은 사건에 정 반대의 반응이 선생님에게 나타난것은 왜일까? 친구와 내가 어떻게 하다가 구멍을 뚫었느냐가 문제였다. 

 “재성이는 아까 연주하지 않고 스틱으로 마구 장난을 치다가 뚫었고 너는 열중해서 악보보고 연주하다가 뚫었다.북이 뚫린건 같지만 재성이와 너는 전혀 다르다”

“휴~~~~, 살았다”


제1편

11장 1959년 5월 -초등4년


김대유 선생님은 정라감리교회 주일학교 나의 4학년 반 선생님이시다.  가르침이 복음적이며 우수했고 게다가 매우 미남이었다. 어느날 4학년 우리반 학생 1명과 함께 바닷가 에 놀러 가자는 것이다.  선생님과 바닷가에 가는일은 매우 신났다. 늘 위험 하다고 바닷가 절대 금령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교회 선생님을 믿고 특별 허락을 하였다.

가기전에 먼저 간단한 음식 준비하기위해 함께 가계로 갔다. 

“정일아 무슨 과일을 살까?”

“사과요”

나는 과일이라면 으례히 사과로 생각하고 있다.

“너, 참외 먹어 보았니?”

“아니요”

“그럼 참외 사가자”

가계에 있는 참외를 자세히 보니 어머니가 국수 삶아 양념을 만들때 보았던 오이와 비슷하게 생겨서 이건 과일이 아니고 야채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날 참외를 사들고 나와 또 다른 친구와 김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바닷가에 가서 실컨 놀았다. 뜀박질, 모래성 만들기, 물장난, 모래 찜질 등 재미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일,,,1년쯤 지났는데 김 선생님이 교회 나오지 않는다. 한주일, 두주일, 7주일이나 교회에 보이지 않는다. 어디 아프신가? 이사갔나? 친구와 나는 궁금해 하다가 결국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심방 하기로 했다. 수소문해서 40분 정도 걸어서 읍내 집으로 찾아가니  골목 골목을 지나서 푸른색 양옥집을 만났다.  삐걱 하고 문을 열고 “선생님!”, 하고 부르는데 아무 소리가 없다. 또 몇번 선생님을 불렀더니 방문이 열리더니 “어, 너희들이구나. 어서 들어오렴” 

들어가자 마자 당연히 우리는 교회 나오지 않은 이유를 조심 스럽게 물어 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일,, 허 참,,교회 빠지는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냥 안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을 깊이 하였다.  아니,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가 만약 예수를 등진다면 우리에게 전한 복음은 유효한가? 이건 오랬동안 나의 숙제였다. 

나는 그때 정라진 바닷가에서  선생님이 사준 참외를 처음으로 맛  보았다.  그리고  ‘김 선생님은 아마도 무슨 피할수 없는 사연이 있었을게다 나중에 교회 다시 다녔을 것이다. 암 ,, 그렇구 말고…’ 라고 중얼 그거렸다.


기독교 대하소설


제1편

12장  1960년 4월 -초등 5-


“치 친구, 나 나 여기서 일하게 해줘, 나 나 있을데가 없어서 그래”

“아이구 너 멀리서 왔구만 그래, 우리집에서 일하고 함께 살자”

바닷가에서 나는 특유한 물고기 비늘 냄새가 나의 추억이다. 그 냄새는 나의 코로 들어와서 이제는 나의 뇌속에서 아련한 추억을 떠 올리게 하는 요소가 되어 버렸다. . 우리집은 하동에서 조금 떨어진 상동, 즉 상가가 있는 곳으로 이사갔다. 그곳은 특히 시장 입구 이기에 우리 아버지가 경영하는 국수공장에는 손님이 많을 것을 예상 했던 터이다. 그런데 다행이 나는 그곳에서는 하동 보다는 교회가는 시간이 절반이나 줄었다. 교회가 상동에 있었기에  너무 좋았던 거다.

이사 하자마자 아버지의  친구가 멀리 북평에서 정라진까지 걸어서 찾아왔다.  걸어오기에는 상당히 먼 걸음으로 아마도 하루종일은 걸렸으리라 생각된다. 그 분은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인데 조금 말이나 행동이 보통사람 같지않고 많이 서툴렀다. 아마도 북평에 있을때 좀 알았던 사람 같은데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물론 없는 홀몸이었다.  

“치 친구, 나 나 여기서 일하게 해줘, 나 나 있을데가 없어서 그래”

“아이구 너 멀리서 왔구만 그래, 우리집에서 일하고 함께 살자”

아버지는 선듯 우리집에서 일하고 함께 밥먹고 자고 살수 있도록 방 한칸을 내어 주었다. 그집은 물론 셋집이고 그분이 온 후론 우리 식구 5명은  모두 한방에서 살아야만 했다.

우리집에서 몇발짝 나아가면 삼거리가 있고 삼거리에는 극장, 병원, 중국집, 등등이 있었다. 어느날 일 하러 오신 그 분이 잠시 밖에 나갔다가 사건을 만났다.  삼거리에는 한 가운데에길 한쪽 부분에 하수도가 있었는데 제법 물이 모이는 곳이라 넓었다. 깊이는 어른이 손을 뻗어도 모자랄 만큼이고 넓이도 하수구 같지 않게 넓었다. 그런데 그분이 그리로 지나다가 그 웅덩이에 빠졌다. 

“누구 사람없소 사람 살려요” 손을 허우적 거리며 소리질렀다.

삼척시에서 공사후에 잘 다듬어 놓지않은 미진한 공사현장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분은 원래 눈이 좋지 않아서 시야가 좁았기에 발 아래에 있는 구렁을 보지 못하였다. 발을 헛디디어서 빠졌는데 소리를 한참 지르니 누군가가 내려가서 건져 주었던 것이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참 서러웠을 것이다. 혼자서 먼길 친구찾아 일거리를 찾았지만 동네에 익숙치 않아서 변을 당한 것이다. 다행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놀랐고 힘 들었었던 것 같다. 그 분에게 아버지와 우리 식구들은 치료와 위로를 해 주고 잠을 잤다.      

약 1년이 지난이후 또 다른데로 가 버리고 말았다. 방랑생활을 하는 딱한 사정이 있는 고독한 사람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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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13장  1960년 6월 -초등 5-

 

“아부지 한개 더해? 아이구,,,”

나의 아버지는 북평에서 국수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강릉 가서 여러가지 기계재료를 구입해서 스스로 조립해서 정라진에 국수공장을 세웠다. . 그 일 때문에 내가 7살에 북평에서 정라진으로 이사온것 같다.

그동네에 처음 세워진 국수공장이기에 소문이 금방났고 인기는 대단했다. 한때 동네 사람들이 골목길에 줄을 길게 서서 국수를 사야했다. 보릿고개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국수를 사러왔다. 부자는 부자대로 맛맛으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쌀 보다 더 손 쉽고 싸게 마련되기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앞에 길게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마치 그 줄이 무료배식을 위한 행사터 같았다 

국수는 크게 여섯단계로 구분된다. 첫째가 반죽이다. 적당한 물과 밀가루 그리고 소금을 물에 타서 부은 다음에 반죽을 한다. 그때에는 정제된 소금은 없고 모두가 굵은 소금 그대로였고 그것을 물에 넣어 녹인후 반죽에 사용된다. 그리고  이일은 모터를 사용하기 전에는 모두 손으로 섞고 비비고 밀고 하였기에 그 정성은 이루 말할수가 없다. 아버지의 손놀림은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 갔았다. 둘째는 반죽된 밀가루를 둥근쇠 사이로 집어넣어 두꺼운 종이장 처럼 만들어 낸다. 셋째는 그것을 아주 얇고 매끈매끈하게 뽑는다. 넷째로 세미한 줄무늬가 된 날에 집어넣어서 국수가 나오면 준비된 대나무로 받아서 걸고 제일 아래는 잘라준다. 다섯째는 이것을 빈 공간에 빨래 널듯이 예쁘고 반듯하게 걸어놓고 약 2틀 혹은 3일이 지난다. 비가오는 장마 시기에는 애태우며 공간을 따뜻하게 해 주어야만 했다. 여섯째는 다 마른 국수를 준비해논 틀에 열개 정도씩 놓고 22센티 정도로 잘라서 묶는다. 대체로 아버지의 손에 잡히면 2인분치 마른국수 제품으로 완성된다. 나는 운동을 별로 하지 않아도 늘 팔뚝에 힘이 있다. 그 이유는 어릴 때부터 모터로 기계가 전환하기 전에 형과 나의 손으로 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일꾼이 전혀 없을때에는 거의 하루 4시간 정도, 일꾼이 있을때에도 2시간 정도는  집에 일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일단 공장에 가서 그 일을 하고서야 저녁밥을 먹는다.  이일을 고등학교 졸업때 까지 이어왔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서 손잡이를 잡고 손으로가 아닌 얼굴을 팔과 팔 사이에 깊이 묻고 몸 전체로 돌리는 때도 허다 하였다. 

어느 한날 밤 9시인데 일을 다 마친줄 알았는데 하루종일 일하신 아버지는 밀가루 한포를 주루룩 하고 또 띁는다. 주문이 많아서 한낮의 일로는 공급이 모자라니 야간작업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형은 묵묵히 아버지의 손만 바라보고 있고 나는 졸리고 힘들어서 아버지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아부지 한개 또 더해? 아이구,,,”   그런날은 10시나 11시에 일을 끝내고 밥을 먹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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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14장 1961년 1월 -초등 6년-


“얼시구 시구 돌아간다. 절시구 시구 돌아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얼시구 시구 돌아간다”

“아~~ 이 날을 어찌우리 잊으랴”

1950년6월25일~1953년7월27일 만 3년 이상 역사에 잊지못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경험하였다.

 그 결과 전투에 참여 했다가 생존한 우리의 아들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심한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특히 팔 다리를 잃은 젊은이들이 직업을 잃고 가족으로 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면서 이곳 저곳을 배회하는 슬픈 현상들을 빚어 내었다. 

우리집은 정라진 삼거리, 말하자면 시골 작은 마을이지만 그나마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에 우리집도 아주 작은 공장인지라 그들이 찾아와서 동냥을 한다. 그들은 도와 달라는 요청이 한단계 더 나아가 모든 상가에 협박을 하기에 이르른다. 지금은 전투 유공자로 나라의 지원을 받을수 있겠지만 당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나 경제가 회복되기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는일이 허다 하였다. 

어느날 다리는 절고 손은 쇠로 만들어 붙인 몸을 이끌고 우리집 문앞에 나타난다. 나는 어린 나이에 국수를 팔다가 쇠 손가락을 흔드는 그들의 모습에 놀라서 벌벌 떨고 있는데 “얼시구 시구 돌아간다. 절시구 시구 돌아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얼시구 시구 돌아간다”

어머니는 다른 한쪽에 가족 식사 준비에 바빳고 아버지는 국수 널어 놓은 곳에 가 가 계시기에 나 혼자 급히 해결해야만 했다. 나는 얼른 몇 푼을 들고 나아가 전달해 주려 하는데 내 손을 뿌리치고 쑥 들어와 돈 통을 움켜 잡는다. 나는 기절한듯 따라 쫒아와서 얼른 장사했던 지폐를 몽땅 긁어서 한 뭉치 가슴에 안겨주면 인사를 수도 없이 많이 하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사라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친구들에게 소문을 내고 그친구들은 또 찾아온다. 그래서 그들이 온 그날의 수입은 절반이상 날아가 버리는데,,,

그래도 지금 생각하니 억지로라도 좋은일이었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맴돈다.

자발적인 구제가 아니라도 6.25 사변으로 극심한 고통을 격는 전쟁 유공자들의 아픔에 동참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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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유초등 시절

15장  1960년 12월 -초등 5-

 

“네 목에 밥이 넘어가나?"

며칠째 야간노동(?)에 나는 몹시 힘이 들었다.  오늘도 학교는 갔다 왔지만 도저히 공장에 일을 하기 싫어서 내 나름 요령껏,, 도망을 쳤다. 평소에 만들어 놓은 약식 스케이트가 눈에 들어온다.  엉덩이 하나 걸칠수 있는 널판지에 아주 굵은 쇠 줄을 구해서 가운데에서 왼쪽하나 오른쪽 하나 못으로 적당히 박아놓은 다음, 앉아야 하는 자리는 좀 더 사각으로 테두리를 얹져서 튼튼하게 한다음, 얼음판을 지칠수 있는 긴 작대기에 끝에 못을 박고 못 머리끝은 다시 망치로 때려서 날카롭게 만들고 나니 완료 되었다.  오늘도 논두렁 에는 적당히  논의 물이 얼어서 스케이트 타기 아주 알맞다.  책 가방을 던져놓고 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뒤로 한채 “에라, 모르겠다~" 바로 재빨리 그것을 어깨에 둘러메고 논두렁 으로 향하여 달려갔다. 

논이 얼었기 때문에 얼음판은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다. 벼를 베다가 남은 것 사이사이에 얼어버린 곳을 찾아 다니며 신나게 지치니 재미는 그저 그만이었지만 손도 시리고 추웠다. 나는 추위따윈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얼음지치기에 열을 올리고 실컨, 정말 실컨 놀다가 보니 어느듯 사방이 어둑어둑해 지며 다른 애들도 하나 둘 떠나서 불과 몇명의 아이를 남겨두고 나도 사방의 시야가 어두워 분간이 힘들어 질 때 쯤에 약간 무섭기도 해서 주섬주섬 철수해서 집으로 사알짝 들어왔다.  공장에서는 아직도 일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공장과 집이 가까이 있었지만 조금 떨어진지라 나는 스케이트를 뒷 마당에 던져 놓고 집 주위에 서성 대었다. 조금후  가족들이 이제 저녁식사 시간이 훨씬 지난 9시 쯤에  모일때  나는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에 앉았다.   나는 배가 고팠고 아버지와 형은 옷에 먼지를 털고 손과 얼굴을 씻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조금 후  음식을 차려놓은 어머니는 아무소리 않고 아빠와 형이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훌터 보고는 금방 밥상에 앉아있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식사가 시작된다. 일하지 않고 스케이트 신나게 타고 온 나는 온 몸이 춥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몸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탕자가 아버지 앞에 당도한 때가 바로 이러한 초조감이 아니었겠는가.  식구들과 나는 식사가 시작 되었는데 아버지는 첫 숟가락을 들지도 않으시고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시고는 아무말이 없었는데,,,, 나의 목에서 밥 한 숟가락이 넘어가는 소리가 꼴깍 난다. 그런데 그 순간  불호령이 떨어진다.

“네 목에 밥이 넘어가나?” 

그러나 놀랍게도 그날은 그것으로 하루가 잘 넘어 갔지만 잠 자리에 누운 나는 깊이 생각에 잠기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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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유 초등시절

 1959년 5월 -초등 4-

‘그래 붙어보자, 어차피 며칠만에 한번씩 만나게 되는데 그냥 맞느니 붙어 승부를 내는거다’

나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기 까지 이르르게 된 것은 그가 나를 한동안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키도 덩치도 컷기에 내가 만만하게 덤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뭔가 좀 엉성한 부분을 발견했기에 결투하기로 맘 먹은 것이다. 

우리집은 가끔 1주일에 한두번 아빠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켜서 가는곳이 있다. 걸어서 약10분정도가면 학교가는 길에 오른쪽에 양과점이 있다. 그곳에는 그동안 즐겨먹던 붕어빵이나 찐빵 정도와는 아주 수준이 높은 빵이기에 그날이 되면 나의 심부름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또 즐거웠다. 한줄이 6개인데 약 2줄만 사오면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님, 나, 여동생 셋을 모두 합치면 8명 한 식구가 하루저녁 간식으로는 멋지다.  

그런데 그리로 지나가는 길에 왼쪽에는 우물이 있고 오늘쪽에 집들이 있는데 웬 엉성하게 키가 크기만한 놈이 나에게 시비를 거는거다. 어디 가느냐? 뭐하러 가느냐? 넌 몇살이냐? 등등 물으면서 툭툭 치는데 성가시기가 그지없다. 때로는 길을 막으며 나의 가는 것은 방해하기가 일쑤이다. 그건 아마도 그녀석이 몹시 심심해서 그러는것 같다. 그러나 불편한것을 참아도 한도가 있다. 

어느날은 양과를 사서 손에 쥐고 돌아 오는데 나의 길을 막아버린다. 양과점을 땅에 놓고 결투의 폼을 잡았다. 그도 역시 주먹을 쥐고 나를 향해 도전을 한다.  나 역시 그보다 키는 작고 약했으나 매일 당하느니 해결을 보아야 할것 같아서 있는 힘을 다해 덤벼 들었다. 허~, 그는 쉽게 넘어졌고 나는 더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과자를 다시 집어들고 뛰어서 집에 무사히 도착 하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무 이유없이 덤비는 자는 허수아비다.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며칠동안 고통(?) 스런 시간을 가지면서 울분에 찬 사람은 속에 강다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길수 밖에,,,  




2021년 7월 11일 일요일

세계를 잠시보다

 영국은 축구가 결승에 오른것을 축하하느라고 들떠 있다.  그러는 중에 코로나 바이러스는 더 많이 전염이 되어가고 있다. 축제에 빠져서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줄 모른다고 하니 신사의 나라 영국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티라는 나라가 그동안 힘들었지만 엊그제 대통령이 암살을 당하게 되므로 더 나라가 혼란에 접하고 말았다.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던 순수한 청년이 오르고 올라 대통령 자리를 맡았는데 결국은 28명의 특별조직대로 인해 그의 자택에서 숨지고 말았다고 한다. 내가보니 그는 개혁을 하기위해 갱 단의 조직을 무너뜨리기 위해 많은 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갱단이 경찰보다 그 힘이 우세해서 나라의 공권력으로도 그들을 무너뜨릴수 없었다. TV 에 나온 그의 모습을 보니 표정은 그만하면 독재자 같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를 독재자라고 시위한 일이 많았다.  

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엄격해도 그렇고 순전해도 그렇고 바란스가 필요한것 같다.  어디 나라 뿐이겠는가? 기업이라는 단체나 사회 각종 조직체들도 마찬가지요 심지어는 가정 공동체도 다스려 나감이 쉬운 일이 아니다.  수장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아야 하지만 때로는 당근으로 때로는 채찍으로 조절하고 솔선수범하고 이끌고 몰아 나아갈때 어느정도의 성과를 이룰수 있으리라 

요세미티와 포틀랜드와 뉴저지에 7월-9월까지 갔다와야 한다. 


  

2021년 6월 25일 금요일

자녀와 부모

 목요일은 아내가 인정이와 대화하는 날이다.  어제는 짐에 갔다가 소샬 오피스에 방문 한다고 하면서 Hemet 에 약 40분 걸려서 가기는 했지만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은줄 모르고 온 사람은 우리들만이 아니였다. 그 짧은 약 15분의 시간에 4사람이나 왔다.  온라인 서비스가 되지만 그 일이 마땅치 않아서 직접 찾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길에 그냥 누워있는 홈리스를 보니 마음이 아파서 바나나 한개와 시원한 물 한병을 주었다. 

 문 닫힌 오피스 앞에서 인정이와 전화 했는데 중요한 이야기라며 스피커 폰으로 과거의 바보같은 일에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빈다. 물론 전화로 한 대화이지만 너무 깊은 이야기라서 만나 이야기 한것 못하지 않게 마음을 울컥했다.  이제 직업을 가지고 아기 둘 낳고 살아가니 하나님 은혜가 아주 크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참으로 많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가족에게 감사 한다고 한다.

결국 수정이의 도움으로 다음엔 미리 약속하고 방문해서 아내의 메디케어 행정을 좀 손 볼 생각이다. 

KARMSS 일은 끝이없다. 계속되는 한분 한분의 이메일, 카톡, 전화, 우편으로 업그래이드 하고 고치고 정리하고 하여 수첩 만드는 그날까지 일이 계속 될 것이다.  이제 거의 60가정이 소식을 보내왔다. 홀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100명은 충분히 넘으리라. 이름, 주소, 전화번호, 이멜 주소 등등은 글자 하나하나 영문과 한글을 번갈아 가면서 적어넣고 고치고 해야만 한다.  옛날에는 Exel 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Google Sheet 라고 한단다. 아들에게 대충 배워서 삽입, 교정 가능하다. 


 


2021년 6월 7일 월요일

엎질러진 물

 엎질러진 물

큰 파랑색 마오병에 물이 가득 들어 있었었는데 내가 뚜껑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드니 그대로 컵이 기우러져 쏫아지더니 물이 3/4 이상이 테이블과 땅 바닥에 쏟아졌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둘다 수건 걸레 등으로 테이블과 바닥의 물을 모두 닦아냈다. 나는 물 뚜껑이 잠긴줄 알았지만 아내는 물 뚜껑을 항상 잠그지 않는 습관이 있다. 소동이 있었지만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상황이 벌어지고 나니 항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가 된 것이다.  

우리집에 살구가 제법 맛을 뽐낸다. 복숭아 역시 잘 익지는 않았지만 맛없다고 말할수는 없다. 오늘은 아내와 돈내기 골프, 나는 20점, 아내는 35점으로 전반엔 내가 지고 후반엔 동수가 되었다.  내가 22점이 나왔고 아내는 35점이 나왔으니 사실상 내가 두번을 진 셈이다.  그러나 아내는 전반부에 딴 1불을 돌려준다. 

KARMSS 는 노동이 점점 많아진다.  1년에 회보 2-3번을 내는 일을 해야하고 이어서 수첩까지 이젠 총무 손에서 만들어 져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