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8일 일요일

목양컬럼 12월


목양컬럼//                            작은것도 중요했다.

년말이 되면 마음이 좀 착찹해 지고 어쩌면 우울해 질수도 있다. 1년동안 별로 해 놓은 일이 없다는 자책감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한일이 참으로 많다. 그런데 해 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은 두가지로 구분 할수 있다.
첫째는 남이 알아 줄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열심히 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기에 허무할 뿐이다.  둘째는 그렇다할 큰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작은 일은 많았지만 눈에 드러날 만한 일이 없어서 남는게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것들이 년말이 되면서 사람들을 슬프게 말들고 있다.

내가 어렸을때의 일이다. 초등학교(국민학교) 5학년때 우리시골 학교에서 밴드부가 생겼다. 나역시 음악을 좋아 하였기에 밴드부에 지원을 했더니 받아 주었다.
맡은 악기는 소북(드럼)이였다. 요즘처럼 큰북 작은북 챔버린이 함께 붙어있는 그런 드럼섿트가 아니라 작은 북 한 개가 나에게 배당 되었다. 나는 처음 그 북을 밴드 담당 선생님에게 받고나서 금방 다른 아이를 훌터 보았다. 그런데 항상 나와 라이벌인 사촌 동갑내기 정교가 큰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어떻게 나처럼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이렇게 작은 북을 맡기고 평소 음악도 별루 좋아 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은 정교에게 큰 북을 맡긴단 말인가? 이 작은 북은 아무리 두들겨 보아도 큰북이 옆에서 치면 큰북에 뭍혀서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그때 용기를 가지고 밴드 선생님께 다가가서 다른 것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물론 작은 북이 가지는 보잘 것 없는 기능도 제시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아이 둘을 불러서 한 아이는 큰 북을 한 아이는 내가 배당 받은 작은 북을 처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교실밖에 이끌고 간다. 아주아주 멀리 밴드 연습 교실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후에 나보고 말한다. “정길아, 지금 작은 북소리가 더 잘 들리나? 큰 북소리가 더잘 들리나?(들리나~는 강원도 사투리, 들리니) 놀라운 일이다. 교실 안에서는 큰 북소리가 온통 지배해서 내가치는 소북은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멀리 떠어진 이곳에서는 큰 북소리 이후에 들려지는 ‘따다닥’하는 작은 북 소리가 큰 북소리 못하지 않게 잘 들리고 아름답기 조차 하였다.
나는 그 이후에 그 북을 사랑하였고 밴드부에서 6학년 졸업할때까지 즐겨 참여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큰일에 관심이 있고 남들이 알아 줄 듯한 일에 관심이 있지만 세월이 조금 지난후 어떤 것이 진품이었는지, 혹 가치 있었는지는 쉽게 발견해 낼수 있다.

한해를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은 뭔가를 아쉬워 한다. 그러나 그 아쉬움이 왜 생겼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면서 작아만 보였던 나의 일들이 결코 세월 안에서 파뭍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볼수 있으면 좋겠다.

복된 성탄, 그리고 희망찬 새해(2012)가 되시기를---
                                                                                12-25-11 여러분의 목사 서정길
"작은 벽돌 하나가 빠지면 집은 무너진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촬영 서목사
 
크리스마스 트리



제가 살고있는 집 Deerfield(사슴이 뛰노는 들판?)로 들어가노라면

오른쪽 4번째 집은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트리를 창으로 보이도록

거실에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지나가면서 매년 보는 그 트리가 또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을

기쁘게 흔들어 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상록수를 쓰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것은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히 푸르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소망을 생각나게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소나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특히 추운 겨울에도 소나무를 집에 들여놓고 키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날

루터는 친구에게 소나무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집으로 안고 돌아오는데

그때 갑자기 소나무 가지가 은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달빛에 반사된 빛 이였는데

그는 그 빛나는 소나무를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비추는 예수님의 생애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의 생애가 반사되는

아름다운 빛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루터는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집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

작은 촛불을 달고, 동그란 빛나는 열매를 달고, 십자가를 달고

처음 추운 그날 밤에 보석처럼 빛나던 그때의 빛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저와 여러분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을 위해 오셨고

또 그 빛을 우리에게 계속 비쳐주시는 빛이십니다.

온세계 만방에

그리고 여러분의 안방과 거실에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감사가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오래오래 간직되었으면 합니다.

받은 사랑을 흡수하지 않고

달빛에 소나무 잎새가 반짝이며 반사 하는 것 처럼

또 다시 나누어 주는 늘 성탄 의미의 마음이었으면 합니다.
                                                                                   12-18-2011  여러분의 목사 서정길






 
                                               약한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헨리 나우웬J, M. Nouwen(1932-1996) 은 네델란드에서 출생하여 1957년에 예수회 사제로 서품 받았으나 다시 심리학을 공부하여 30대에 노틀담 대학과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풍요로운 생활에 죄책감을 느끼고 페루의 빈민가로 찾아가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찾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에서 강의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영혼의 안식을 느끼지 못하자 강단을 떠나 정신지체 장애자 공동체 ‘라르쉬’공동체인 토론토 캐나다로 갑니다. 그는 거기서 24살된 애덤이라는 청년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됩니다. 처음에 애덤과 함께 있는때 그는 두려웠고 그래서 에덤을 돕는 일이 쉽지많은 않았습니다. 그의 일과는 이러합니다.

아침 7시에 에덤의 방으로 가서 그를 깨웁니다. 그리고 부축해서 화장실을 가는데 행여 발작을 일으킬가봐 극도로 조심 합니다. 그는 헨리많큼 몸이 무거워서 옷을 벗긴 후 욕조에 들어가게 하려면 낑낑 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을 부은뒤 씻기고 머리를 감기고 다시 밖으로 나오게 하여 양치질을 해주고 머리를 빗기고 도로 침대로 데려 갑니다. 그리고 옷을 입힌 다음 뒤에서 부축하여 함께 주방으로 걸어 갑니다. 에덤이 무사히 식탁에 앉으면 그는 아침식사를 차려 줍니다. 에덤이 숟가락을 들어 입에 까지 가져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에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의 먹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 봅니다.

그리고 헨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말없이 앉아서 누군가를 지켜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연구하고 강의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영향을 끼치고 그렇게 하기에 바빳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헨리 나우엔은 뭔가 이전에 가지지 못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일단 두려움이 약간씩 줄어들었고 그 다음 자신이 지금 에덤을 많이 생각하고 있고 에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깨어진 사람(에덤)을 통해서 자신에게 뭔가를 말씀 하시는 것을 느꼈고 에덤에게 애정을 발견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자신이 이제는 그와 서로 속한자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에덤을 통해 뭔가를 배우기 시작 하게 됩니다.

첫째 존재가 행위보다 중요함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을 그(에덤)가 자신에게 가르쳐 준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은 생각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행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었고 나 인생이 그동안은 행위, 행위, 행위, 오직 그것의 연속이었다. 나는 쫓기는 사람이었다. 오만 가지 일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결국은 내 가치를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나에게 ‘헨리, 잘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에덤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당신이 나와 함께 있는 한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상관 없습니다.-

둘째 헨리는 에덤을 통해 마음이 머리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지체 부자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이전에 자신은 머리로 생각하고 논증하고 토론하고 집필하고 하는 그런 행동으로 살았지만 지금은 마음으로 말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에덤의 마음이 진정한 인간의 마음임을 알았고 또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잇는 마음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셋째 헨리는 에덤에게 공동체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 내려고 안달하는 세상을 살았지만 이 에덤은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헨리도 필요했고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의 연약함 덕분에 자신을 비롯한 또 다른 사람들도 이 공동체에 들어 왔고 결국은 그의 연약함이 우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미주리 호텔에 가서 120명의 연약한 사람들에게 맛있는 중국음식을 정성껏 대접 하면서 그들에게 기쁨을 안겨 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에덤을 만난 헨리 나우웬 처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배울수 없는 일들을 우리보다 더 약한 이들에게 배우도록 하나님이 인도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스프링 필드 중앙교회 성도님들,,,



                                                                             12-11-11 여러분의 목사 서정길
                                          요세미티 등산로에서/촬영:서목사






                                                 사람이 되신 하나님
피엘스 부부는 아주 다정한 부부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부인은 남편을 위해서 늘 전도합니다. “여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어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땅에 오셨단 말이예요” 그말을 들은 남편은 대답을 합니다.“뭐 그런말이 다 있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니 뭣 땜에 그런단 말이오”
그러던 어느날 성탄이브가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교회에 봉사하러 갔고 남편만 혼자 집에 있는데 피엘스는 난로가에 불을 쬐면서 앉아서 불만에 쌓여 있습니다. “에이, 남편 혼자두고 교회가서 뭘하고 있담 심심하구만--”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눈뭉치를 던지듯 유리창이 꽝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도둑이 왔나?” 그는 다시 난로가에 앉아 있는데 잠시후에 또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가만히 보니 참새 한 마리가 방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다가 창문에 부딪처서 떨어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피엘스는 가엽은 생각이 들어서 창문을 열어 주었지만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만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얼른 게라지 문을 열고 이리라도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였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는 집 입구까지 모이를 뿌리면서 오라고 했지만 그 새는 올줄을 몰랐습니다. 피엘스는 어떻게 하면 이 추운 날에 가엽은 참새를 따뜻한 집으로 들어오게 할까? 하고 연구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맞아 내가 만약에 참새가 될 수 있다면 아주 잘 설명을 하고 방안으로 데려 올텐데” 그때 바로 멀리서 크리스마스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는 무릅을 탁 치며 “아 맞아 과연 그렇구나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로구나! 아내가 나가는 교회에 가야지 그리고 아내에게 말해야지-- ” 그는 외투를 입고 신발을 신었습니다.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거한다라는 것은 표준 새번역에는 우리 가운데 사셨다.” 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와 살고 있습니까? 본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2000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나타 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이땅에 요셉이라고 하는 가정에서 태어 났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 나실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1:31) 마리아는 놀라서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습니까? (1:34)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럴 때 다시 하늘에서 천사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1:37)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천사가 밤에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누인 아기를 볼 것이다” (2:10-12)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하늘로 올라가고 목자들은 천사들의 말을 믿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인류를 구원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때에 큰 별 하나를 유난히 반짝이게 하였습니다.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별을 보고 따라 가다가 결국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중에 수염이 긴 박사는 황금을 가지고 예수님께 드리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입이 크고 튼튼하게 생긴 박사는 유향을 바치면서 “저희들이 별따라 여기 까지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몸이 빼빼하고 지혜롭게 생긴 박사는 귀한 약품을 가져와서 예수님께 드리며 말하기를 “예수님 추우시겠습니다. 몸조심 하시고 건강하게 잘 자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피엘스는 참새를 따뜻한 방으로 안내 하려고 “나도 참새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을 했는데 피엘스는 참새가 되고 싶은 생각만 했고 하나님은 생각만 하신 것이 아니라 생각도 하시고 또 직접 죄많은 사람을 용서하고 구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어떤 사람은 모르는 척 했지만 또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12-4-11 여러분의 목사 서정길

"갈릴리의 아침"
갈릴리 호수, 이스라엘에서 <촬영:2005 서목사>



2011년 12월 17일 토요일

주일낮 설교 12월(2001년)


별 따라
창 1:14, 마태2:1-12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12-25-11 서정길 목사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셀수 있느냐?” 창15:5 라고 물어 보신후 22:17에는 하늘의 별을 바다의 모래와 비교하면서 측량할 수 없는 숫자라고 하였습니다.
창조과학 학회에서 별의 숫자를 백해(일십백천만억조경해미) 로 추정해서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1하고 0 이 22개로 표기 하였습니다.
좀 쉽게 표현하면 한 은하계에 천억 이상의 별이 있고 그 은하계만 해도 천억이 됩니다. 이것도 발견 가능한 숫자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별의 숫자를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라고 동방 박사들이 한 말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그 많은 별 중에 한 개가 궤도를 달리했다는 것이 발견된 것입니다.
10,000,000,000,000,000,000,000 중 한개

1. 등장한 사람들
1)헤롯
헤롯은 BC 37 년에 왕위에 즉위해서 AD 4년에 죽었습니다. 유대 정통 학자 요세프스 에 의하면 그는 BC 4년 3월 12-13일에 즉 월식이 있은 후에 죽었다고 기록을 찾아 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헤롯이 죽기 얼마 전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은 BC 4-6년 정도로 추상년도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넘어서 13절(마2:13이후) 이후에 보면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16절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로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라는 엄청난 일입니다. 그래서 18절에 “라마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고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꿈속에 지시해서 요셉이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을 하였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간 것이 기록 되었습니다.
'헤롯'은 정통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는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손으로 에돔(이두매)사람의 후예이므로 사실 유대인으로 부터는 반감을 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가만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가만히’는 박사들에게 공개적으로 연구케 한 것이 아니라 지금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공개하지 말고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해서 어디에서 누가 나는지를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2)동방 박사들
  가. 지식인들
여기 본문에 나타난 동방박사들은 아마도 예수님께 예물을 드린 것이 세가지 황금 유향 몰약이기 때문에 세명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것이 틀렸다고 열을 내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세명이든 열명이든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전문가입니다.  전문가란 뜻은 '어떤 특정 부분에 연구해서 남에게 자신있게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 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두가지 면에서 전문가인데 첫째; 천문학자(별들을 연구하는 일)들입니다.
-천문학을 통해서 이세상의 이치와 큰 일들을 알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창1:14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때에 우주의 움직임이 하늘이 있고 궁창이 있고 광명이 있고 주야가 있고 그래서 그런것들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게 한다”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믿으면서 천문학을 연구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각종 문서들 중 예언서들에 대한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각자마다 여러 가지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 취향과 관심에 따라서 연구도 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그런데 학자라고 해서 모두 다 자신의 분야를 열심히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유대역사 특히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과 하늘에 있는 별을 연구해서 앞으로 닥칠 일을 예견하는 일에 전문가였습니다.
나. 먼 거리의 사람들
이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였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할 때 몇몇 추상을 하게 되는 데 동방을 ‘페르시아’ ‘메데’ ‘바벨론’ 혹은 ‘아라비아’ 등등을 추상하는데 대체적으로는 ‘바벨론’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벨론이 가장 강대국이었고 또 별을 구체적으로 1년이상 한 부분을 연구할 수 있는 나라라고 할 때 그 나라가 가능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동시에 메시야가 날 것에 대한 예언과 별에 대한 연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 사람이라고 하니 정통 유대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 와서 “별을 보고 왔는데 유대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십니까?”하고 물었지만 유대 본토에서는 그때 까지만 해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소동이 났다”고 했습니다.
유대 본토에는 하나님이 이끌어 나가시는 일의 중요한 일이 였지만 상징이 되는 별에 대해서나 예언자들의 예언에 대해서 무관심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무시했고 필요없는 잡다한 종교의식들만 판을 치는 모습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즉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섭리에 대한 연구였고 또한 발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천체를 통해서 인류의 모든 섭리를 이끌어 나가셨음을 말해 주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은 이세상의 공해나 전쟁으로 인한 폐허들만 낳았지만 하나님을 바로 알려고 노력했던 지인들은 천체 속에서, 역사 속에서, 구름과 바람속에서, 한해의 마침과 한해의 시작 속에서 과연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계획 하시는 지를 관찰하고 용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 갈 것입니다.
 
2. 그들의(동방박사들) 위대한 점
1) 별을 분석하고 따라갔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두고 분석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작 할때는 분석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어떤 일이 시작된 다음에는 열심히 따라가는 것이 옳습니다.
제가 교회 목회생활을 해 보니 막상 결정할 때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정된 것을 진행 시켜 나갈 때에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나 공동체 안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결정할 때 신중히 하고 그런 다음에 스타트를 했으면 무조건 앞선 사람을 밀어주고 따라가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직업의 본능대로 별을 분석하였습니다. 천체의 변화를 분석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일학교 시절에 연극할 때는 “이상한 별이 저기있다. 와~~ 저 이상한 별을 따라가자!” 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상한 별은 아무나 볼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이상한 표징이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방의 박사들에게 특별한 표적을 보여 주셨는데 그 별은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현상은 아무나 볼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전문전이 지식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1년을 연구한 후에야 겨우 알아낼 수 있는 별이 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별을 발견한 후에 그 별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따랐습니다.
2) 중요한 것에 대한 투자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연구하고 발견된 기이한 별의 움직임에 대해서 그냥 논리적인 발표만 하고 연구 논문 잘 쓰고 PH. D학위 하나 받고 좋은 직장 '구글'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고 잘먹고 잘 산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별따라 머나먼 길을 여행, 즉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기까지 의미있는 여행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향해서 그 많큼 메시야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말입니다.  갈망입니다. 나의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과 구원에 대한 목마름 즉 갈망이 있어야 비로소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말입니다. 투자입니다. 이들에게는 시간의 투자와 물질의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여행을 하였고 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각각 준비해서 가지고 예수님앞에 가서 예물로 드렸습니다. 서로 선물이 중복이 되지 않게 잘 의논하면서 준비한 매우 이지적이고 열정적이고 합리적이었었습니다.
3) 국수주의 에 머물지 않았다.
성경은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따라왔고 유대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이들이 바벨론에서 온 박사들이라면 지금으로 말하면 최대강국에 최고의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주 약소한 국가 조그마한 동네에 찾아 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것은 의미중심, 목적중심, 예언성취 중심의 인생관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비록 이들이 다른 나라 특히 시골 조그마한 동네 ‘베들레헴’에 왔지만 거기까지의 여행은 적어도 일생일대에 있어서 시간을 투자할 충분 가치있는 일이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고집많은 유대인 땅에--그리고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라고 무시하지 안았습니다.
자 잠시 성경 이야기를 다시 봅시다. 헤롯왕이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라고 물으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도서관에 들어가서 예언서를 펼치면서 집중적인 연구를 해서 헤롯에게 보고 합니다.
5절 을 이해하기 좋게 표현해 봅니다.  “저기-왕이시여, 왕이 말씀하신 그곳은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곳입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6절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라라 아~ 이렇게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보고 드립니다.” 제가 번역했으면 이렇게 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그들은 그냥 조사했고 보고만 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체제는 남았지만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니 스프링필드가 작아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이 이 베들레헴이 그렇게 작아도 무시할 작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예언이 되었고 그 예언대로 일이 성취되는 이 사건을 두고 그들은 '내가 바벨론 백성인데, 박사인데--'라는 의식을 내어 버리고 별따라 찾아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은 이세상 어느곳에나 영향을 미칠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국수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한때 우리 한국에서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는 서구종교가 아닌가 우리 한 민족은 역시 불교나 유교를 따라야지 라는 어리석을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서구종교, 동양종교, 백인, 아세아인, 흑인, 왕, 노예, 신사, 노동자, 모든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 바로 복음이 가지는 힘입니다. 할렐루야!!!
달과 별은 누구든지 볼수 있듯이 복음도 누구든지 믿을 수 있고 따를 수 있다는 범 세계적, 범인종적, 범 계급적이 될 때 막히지 않는 물이 작은 틈 바위 속으로 흘러가듯 거침없이 어디든 흘러 가도록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어제와 오늘은 누구를 만나서도 “메리 크리스 마스!!” 라고 인사하면 얼굴 찡그릴 사람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냥 할리데이로써의 메리 크리스 마스가 아니라 진정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들레헴이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도 영접 할 수 있다는 믿음과, 범 세계적인 능력과 힘이 예수안에 있다고 믿는 그 믿음,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높이 산위에 설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4)예수님께 경배 드렸다.
11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략을 예물로 드리니라
박사들은 예의를 갖추어 아기께 경배 하였습니다. 경배의 대상이 마리아도 아니었고 요셉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라도 경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경외할 수 있고 존경의 표현을 할 수는 있고 그를 무척이나 닮고 싶은 인물은 이땅에 많이 있지만 오직 경배를 받을 수 있는 분은 유일한 하나님이신 그 아들 예수님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행
눅2:1-20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12-18-11 서정길 목사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와 염려로 LA 한가운데서 열리는 저희 아들의 결혼식에 두 장로님과 권사님 과 함께 잘 참석 했습니다. LA 한 중앙지점에 야외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하였는데 약300명 정도 참석을 하였습니다. 전 교회 후레스노에서 20명 정도, 우리교회 3분, LA 지역에 제가 아는 분 7-8분 그래서 저의 하객은 약 3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신부댁의 하객들이었습니다. 신부 아버지는 미국에 14살에 왔기 때문에 이민 초기의 가족이라서 친척이나 친구들, 그리고 LA 영락교회에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LA 영락교회 전도사님이 주례를 하였고 제가 혼인선언과 축도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LA 는 비행기로 약 3시간이나 걸렸고 출발전에는 미국의 테러 경계태세로 말미암아 엄밀한 검사를 두 번이나 통과 해야만 했습니다. 갈때는 무사히 쉽게 통과 되었는데 올때는 짐이 좀 있어서 검열을 당했습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 같이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 여행이나 해 볼까요? 목적지는 베들레헴, 그러나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충분히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서 시작해 봅시다.
예수님의 탄생 혹은 어린시절은 마태와 누가만 기록하였는데 누가의 기록이 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출발목적(1-3)
 
3절-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1절-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아구스투스 황제
아우구스 투스 황제가 실권을 잡은지 얼마되지 않자 로마제국의 통치기반을 든든히 하기위해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 국세조사 곧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목적은 두가지 첫째는 세금 재원을 파악하기 위해서 둘째는 군대동원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옛날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하나님께 혼난 일이 있어서 인구조사를 그리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인구조사는 옛날이므로 조금씩 조금씩 몇 년 걸려서 이루어 지곤 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나사렛이란 동네에 살았는데 유다의 자손이므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유다지파 다윗의 족속들이 모두 그곳에 가서 인구조사에 응하여야만 하였습니다.
 
2. 머물 곳(4-7)
 
요셉은 사실 혼자 인구조사에 응하기 위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꼭 마리아가 필요로 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혼자 둘수 없었던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그곳에 그냥 두고 요셉혼자 멀리 베들레헴으로 갈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려깊은 요셉은 배가 부른 마리아를 데리고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7절에 ‘사관’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여관’ 이란 뜻이며 또 다른 번역으로는 ‘객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인구조사로 인해서 유다족속은 모두 한꺼번에 베들레헴으로 갔으므로 먼저 온 사람들이 이미 객실을 꽉 채운 상태입니다. 그래도 우리들의 생각에 좀 야속한 것은 아무리 먼저 방을 예약 했다 할지라도 출산직전에 있는 만삭의 임산부를 모른척 한다는 것은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에는 마켓에 임산부가 계산할 수 있는 계산대를 따로 준비해서 임산부가 너무 오래 줄을 서서기다리지 않게 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율법을 잘 알고, 유다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들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어찌 이러 한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자기가 먼저 예약을 하여 빌린 방이지만 만삭의 임산부에게 내어 줄수 있는 그런 정도의 마음도 없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 그들은 모든 일에 기득권 행사가 심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모두 욕망으로 변해 버린 이세상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은 비록 선민 이스라엘이라고 할 지라도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아닌 그런 마음이니 그들의 마음 한 가운데 아기예수를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 리가 없다고 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또 다른 여행자들(8-20)
 
첫번째 여행은 아무 생각없는 유다 족속인들의 단순한 제도에 의한 여행자들이고
두번째 여행자는 구세주를 잉태한 마리아와 요셉의 여행이었다면
셋 째 여행은 바로 천사의 소식을 듣고 움직이게 된 목자들의 여행입니다.
유대사회에서 목동들은 천한 직업으로 분류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일은 세상 권세자 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힘없고 멸시받는 목자들과 하늘의 천사들을 통해서 시작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절-
여기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은 예수님의 탄생이 온 인류에게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실 얼굴을 찡그릴 수가 없습니다.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큰 기쁨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천사는 말합니다.
11절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즉 우리를 위해 구주가 탄생하셨다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기뻐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구유에 누인 예수를 처다만 보고 그냥 재미있어 하면 않됩니다.
그분은 비록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있지만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실 ‘구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마리아의 품안에 안겨있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그들의 심볼로 하고 있는 카톨릭이나 러시아 정교회는 이점에 있어서 중대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할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도 아기예수에 관한 카드를 선택하서 친구들에게 보내거나 또 성탄극을 꾸며 행사를 하지만 아기 예수는 우리가 그냥 갓난 아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넘어 선다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3절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 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지난주일에 저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우리교회는 적은 인원으로 100명이 넘는 홈레스 피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습니다. 가정의 파탄으로 갈곳이 없어 고통을 겪다가 겨우 머무르는 장소에 기거하고 있는 100명이 넘는 피해를 당해 몸과 마음이 상해 있는 그들에게 여러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아기예수의 오심을 기쁨을 전달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들은즉 여러분들이 너무너무 기뻐하며 즐거움으로 이 사역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왜 그토록 기쁨으로 그 사역을 하였는지를 압니다. 그것은 비록 한끼의 음식이지만 어려움을 당한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며 동시에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창조 하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창조 하셨으며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구원과 운명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땅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수천년간에 걸친 이러한 구원의 계획이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일이 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맞이하여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먼저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땅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아무 생각없이 나의 평화 나의 즐거움만을 생각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이 시대는 다시한번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비로소 이 땅에는 평화가 깃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근거요 기초입니다.
여기 본문 14절을 자세히 보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이라고 표현 되었습니다. 여기 ‘기뻐하심’이란 헬라어 단어 원어에서는 ‘유도키아(eudokia)’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은혜, 곧 평화의 은혜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요 동시에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일로써 이루어 집니다.

4. 나의 여행
저와 여러분은 지금 베들레헴으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비행기 티켓을 끊지않고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예수님의 탄생시기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베들레헴 아기예수를 만나러 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
1)성서속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예언된 말씀과 그 예언된 말씀이 성취된 고귀한 말씀 말씀 들이 우리들의 가슴을 텃치하는 순간순간에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습니다.
2)기도로, 예수 내 마음에 계심을 확인 하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성령의 감동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베들레헴으로 지금 인도하고 있습니다. 
3)고백으로,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동정녀 탄생과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 하심”을 믿음으로 “예수님이 나의 주신되심” 을 고백함으로 우리는 지금 베들레헴으로 충분히 가고 있습니다.
4)증거 함으로, 예수님이 인류의 구주시다는 것을 알림으로 증거함으로 증거하고 알리고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헌금으로 지원 함으로 진정한 베들레헴의 여행자가 되고 있습니다.
5)믿음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의 가장최선의 삶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실천 함으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도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갈 것을 소망 하면서 우리들은 충분히 당시 유다자손이라고 큰 소리치는 사람들의 무의미 함 보다 훨씬 의미있게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이 한번은 즐거웠고 한번은 힘들었습니다. 갈 때는 짐이 없어 즐거웠고 올 때는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물건이나 책들로 인해서 짐이 많아서 힘 들었습니다. 그러나 보람은 있었습니다.
아무튼 여행은 간편해야 즐겁다는 것은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복음을 들어도 복음인줄 알지 못한 무지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시에는 복음을 들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너무 애착을 가지므로 자신의 욕심이나 체면이나 직분이나 의식들의 쇠사슬에 묶여 있으므로 예수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무 힘이 없고 무력하다는 세상적 기준을 가지고 보았으므로 목자들처럼 순수한 여행, 천사들의 예고에 즉각적인 반응을 할 사람들이 많지 못했습니다.
천사의 음성에 훌훌 털거 그냥 달려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결코 많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땅에 구세주께서 오셨지만 영접지 아니하였고(요1:11) 우리는 지금 200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으로, 믿음으로, 고백하므로, 증거함으로, 믿음의 삶으로 예수님을 향한 베들레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해 말한 것을 다 말해 주었습니다. 목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 하였고 천군천사들의 찬송 내용이 그들에게 그대로 전달 되었습니다.
 
결론
베들레헴에 일찍 도착하였으나 여관을 점령해 버린 여행자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와 요셉의 여행자들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축하하기위해 출발한 목자로서의 여행자들
지금 비록 2000년 후에 태어난 우리들이지만 그를 알고 믿고 고백하고 증거함으로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 각각 어떤 여행을 하고 있다고 여기 십니까?
 
여행은 목적이 있고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목적이 있고 어떤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을까요?













요세미티 국립공원/촬영:서목사



은혜와 진리
요1:1-14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12-04-11 서정길 목사
 
LA 몇 개의 큰 교회중 LA 영락 교회 가 있습니다.
그들은 약 30년째 주일 정규 예배후에 꼭 오후시간을 이용해서 홈 레스 피플들에게 선교합니다.
다운타운에 들어가서 빌딩과 빌딩사이 파킹장을 사용해서 의자를 펴고 찬양을 인도하기 시작하고 모이면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전화를 사용 할 수 있는 배려로 전화기가 없는 그들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하곤 합니다. 모든 예배와 행사가 진행되는 중에 한쪽에서는 기도팀이 있어 그 예배와 행사진행을 위해 도고의 기도를 계속 합니다. 예배와 각종 순서를 마친 후에 자기가 앉은 의자를 반납하면 거기에서 의자와 빵과 바꿉니다.
어떤 한 청년이 10년동안 계속 찬양팀장으로 일을 했고 어떤 여청년 하나가 10년동안 기도팀장으로 일을 했습니다. 보통 홀레스 피플 선교는 재미가 없기 때문에 모두들 조금하고 빠져 버리는데 두 청년은 찬양팀장과 기도팀장을 10동안 꾸준히 해 왔는데 그 둘이 둘은 복음안에서 서로의 꾸준한 사역에 감동을하여 사귀다가 이번 12월 10일에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결혼식에 참석해서 최종 부부선언을 하게 됩니다. 기도해 주시면 잘 다녀오겠습니다.
 
복음이란 처음에는 미약한 것 같지만 이것이 잠시가 아니고 봄 여름 가을과 그리고 겨울을 맴돌면서 계속 되어질 때 거기에 어떤 파워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마도 수정캐기를 계속 하는 중에 여러분이 모르는 어떤힘이 작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수정캐기가 다 끝날때에는 여러분 각자에게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저는 기대 됩니다.
성경 전체가 복음이라 할 수 있겠지만 66권의 성경중 가장 큰 기초를 기록한 책은 성경중에 요한 복음과 로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절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 “태초에--”라는 말씀은 마치 구약성경 창세기 1:1 태초에라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 요한복음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시작이 됩니다. 새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에는 “계셨다”라고 기록이 되었습니다.
“계셨다.”란 말 원어 헬라어에는 ‘엔’이란 단어가 기록되었습니다. ‘엔’ 은 영어에 was 인데 미완료 과거형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과거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까지 연결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땅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작년에도 존재했고 1000년 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1000년 후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도 제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었고 내일은 잘 모릅니다. 무슨일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고백 합니다.
시편71: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 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나를 택 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 하리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내가 어머니의 태어서 나기 전부터 택한바 되었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
이렇게 믿기 때문에 사실로 말하기로 하면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완료 과거형이고 미래 진행형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들은 소리로 된 말이나 글자로 된 언어를 생각합니다.
본문 1절에 나타난 말씀은 원어에는 “로고스”인데 이 로고스에는 “호”라는 단어가 붙어서 “호 로고스”라고 해야 합니다. 그 ‘호’ 는 정관사이기 때문에 “그 말씀”(14절)이라고 해야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본질인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다. 즉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라고 해석을 해야합니다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모세도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십계명을 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정확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마음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2절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런데 2절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1절에 “말씀”을 2절에는 “그”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언어라고 생각한 것이 갑자기 사람이 된 것입니다. word 가 he 로 바뀐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어는 언어가 아니라 그 어떤 분을 지칭한 것이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궂이 이해 하려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사람은 책을 통해서 한 위대한 인물을 알게되고 마음속에 담게되고 또 더 나아가 그분을 닮고 싶어 합니다.
나는 쉐익스피어를 보지 못했지만 쉐익스 피어의 글중 햄릿을 읽거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면서 그의 사상 세계관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그런 정도보다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4절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잠시동안의 감동이 아니라 그 분안에서 읽고 접한 사람이 생명적 관계가 형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빛이라는 말과 생명이란 말이 있습니다.
원래 물리세계에서 생명이란 빛이 있어야 합니다.
화분을 가끔 밖에 내다놓고 빛을 보여준다. 그래서 잘 자라게 해 줄려고 한다. 저는 얼마전에 화분에 빛을 좀 받으라고 내어 놓았다가 깜짝잊고 들여놓지 않아서 갑자기 다가온 호된 추위에 얼어 버렸습니다.
빛을 받아야 생명이 유지되고 생명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9절-11절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 참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이 그 참빛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두움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참빛인지 몰랐 습니다. 왜 몰랐고 왜 어두움의 지배를 받았는가 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 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완악해 졌는가 하면 참 빛 보다는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사람을 지배 했기 때문이다. 다른 더 많은 관심이란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을 보호 해 줄것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필요로 하는 것들, 안전히 지켜줄 것들, 자신의 입지를 더 높여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 이것이 얼마나 가치없다는 것을 어렴픗이 알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은 그런 허망된 세상의 욕망들을 잡으려고 진력하고 있습니다.
예>짐승들이 떼로 몰려서 어딘가로 가는데 뒤에 따라가는 짐승은 앞에 놈이 가기 때문에 그냥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앞에 것이 아니다 여기 잘못온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도 아무의미없이 따르기만 한 다른 짐승들한테 밀려서 그냥 가게 됩니다. 나중에 제일 앞에 있는 짐승이 낭떠러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뒤로 보면서 낭떠러지니까 이제 그만가자 라고 소리 질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 밀려와서 많은 짐승떼들이 낭떠러지에 그냥 모두 떨어져 죽어 버리는 기현상들이 생겨 집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그렿게 열심히 쫓아 가는 것은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자신의 입지를 높여 주거나 자신을 안전하게 해 주는 것들은 아닙니다. 뭔가를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교가 없어지면 큰일나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직분이 없어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고유권한이 없어 질까봐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 하였습니다.
 
그래서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아니 하였” 다라고 기록 했습니다.
14절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개역개정-
14절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였다.”-현대인의 성경-
 
The word become Flesh
 
--- 인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다.” The word become Flesh
여기 육신은 영어로 Flesh- 1)살 2)육, 3)정욕 4)인간성 인간미 5)인류
그러므로 말씀이 인류가운데 머물렀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말씀은 그냥 언어가 아니고 하나님 본체의 표현이 됩니다. 신성한 하나님의 본체의 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세상 인간사, 인류 흐름의 전체에 들어왔다는 뜻이 됩니다.
구약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장막 짓기를 명령 하셨고 그리고 그 장말 가운데 하나님이 거 하셨다. 이 거 하셨는 것이 바로 임재를 말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하심, 임재, 죄많은 인간속에 관여하심, 역사하심, 구출하심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이세상에 모든 인류들이 이 신비한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 하여 예수님이 여러분 중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한번 만나 악수 하는 정도나 차 한잔 마시는 정도의 미딩이 아니라 오래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같이 산다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 바로 은혜요 이 은혜를 아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14절을 우리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개역개정-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서목사 촬영
                                                                                              -끝-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오늘의 메시지 11월 (지난주 설교전문)


죽음에서 새 생명에로(사도신경 강해 6)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시고”
마27:32-44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11-27-2011 서 정 길 목 사
 
현장의 문제:

 
미국 공화당 차기 대통령 경선 주자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가 지난 11월 9일에 방송 토론회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세 개의 부처를 없애고 작은 정부를 구현하겠다고 하는 중 새 공약을 소개하면서 첫째 상무부, 두 번째는 교육부 그리고 음 음 하였습니다. 노트를 뒤적이고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더듬거리다가 53초가 흘러 갔습니다. 미국 언론은 경선 첫 관문인 토론회에 자신의 새 공약 세 번째가 생각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지지율이 한층 내려 갔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신문에 났습니다. 그 세 번째는 에너지부였습니다. 우리는 잠고대 중에서라도 잊지 않고 외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입니다.
강해
1. 고백하는 신앙(서론)
2.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3.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4.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 에게 나시고
5.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6.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1. 죄와 죽음
 
어느날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에게 묻습니다.“선생님 귀신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선생님 죽음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죽음 이후에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말해 주세요” 공자가 대답 하기를 “살아 있는 동안에 일도 다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죽은 이후를 알고 귀신의 정체를 알겠소 방법은 하나밖에 없소 자네와 내가 지금 죽어 보는 방법이요”
이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부요했든, 가난했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프리카에 살든, 어떤 최고의문명 도시에 살든 모두모두 죽음이라는 종착점이 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죽음도 참 종류가 많습니다. 그런데 죽음 중에 죄인으로 감옥에 살다가 일정한 날을 받아 처형되는 사형수의 죽음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중에 로마시대에 십자가의 죽음은 정말로 비참했습니다. 당시에 가장 모질고 최고로 극악 무도한 죄인에게 내리는 것이 십자가 형입니다. 이형벌은 본래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 죽이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땅은 본래 신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쁜 죄인을 땅에다 놓고 죽이면 땅이 더러워 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중에 매달은 시체를 나중에라도 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어서 새들이 띁어 먹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방법입니다. 이런 십자가 형을 로마 사람들이 도입을 하여 당시 죄인들에게 적용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인에게는 십자가 형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그들의 노예나 식민지 사람에게만 내리는 형벌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잔인한 로마 군인들이라도 십자가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면서 만일 황제가 식사할때 누군가가 십자가 이야기를 했다가는 당장 끌어내어 매질을 가할 정도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한번 달리는 것을 본 사람은 평생 잊을 수가 없는 악몽으로 그 광경이 아주 무섭고 비참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밤에 미국 백악관과 CTU 라고 해서 테러분자들을 대응하는 기관들의 움직임을 소상히 알려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24시,2부 16번의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 됩니다. 사실은 중동 몇나라가 주도한 것이 아니고 “제2의 물결” 이라는 아주 고약한 테러단체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핵 폭탄을 터트리는 일입니다. 특수임무를 띤 잭 바우어가 팀을 이끌고 그 핵 폭탄 장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발견 했을때에 이미 타이머가 작동되기 시작했습니다. 훌륭한 기술자를 동원해서 그것을 아무리 헤체할려고 해도 헤체할 방법이 없습니다. 할수 없이 두가지 방법이 제시 됩니다. 하나는 물속에 그 비행기를 집어 넣는 일이고 하나는 라스베가스 가까운 사막 중 움푹진 곳에서 터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닷물속에 넣으면 수많은 물고기가 오랜 세월 살아 갈수 없고 나중에는 서서히 육지에까지 그 핵 방사능이 올라오기 때문에 피해가 상당하다는 것이고 둘째 사막 움푹 파인곳에 잘 뭍어 터트리면 인명피해를 거의 없앨수 있는 제안인데 문제는 그 비행기를 한 사람이 타고 가장 깊은 계곡에 정확하게 안착해서 터트려야 하기 때문에 조종사는 그 자리에서 핵 폭탄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CTU 특별요원으로 가장 중요한 임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는 주인공 잭바우어가 지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과 전화를 하면서 마지막 딸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너를 사랑한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울었습니다. 아무리 영화지만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던져서라도 수백만명의 생명을 건지려고 하는 그 위대함에 감동된 것입니다. 동시에 저는 눈물을 닥으면서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하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CTU 현장 책임자가 업무 수행중에 방사능에 감염되어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그 비행기에 몰래타서 자기는 이제 죽어가는 몸이니 자기가 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잭 바우어 한테는 낙하산을 주고 내리라고 하고 자신이 그 비행기를 운전해서 목적지에서 핵 폭발을 시키면서 죽어 갔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쏘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비교해 놓은 이야기를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생각하기 보다는 쏘크라테스의 죽음이 아주 멋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죽음을 알게 될때 제자들이 그가 도망칠수 있도록 간수들을 다 매수 해 놓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도망을 칠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도망칠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권유를 거절하고 오히려 음독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독 자살로 매우 고요하게 조용하게 태연자약하게 그리고 자는것처럼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제자들을 꾸짖으며 이웃집 친구에게 빚진 닭 한마리를 갚아 달라고 최후의 부탁을 하고 죽어 갔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당당하면서도 편안한 죽음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은 너무나도 비참한 죽음이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형의 틀을 지고 눈물의 고갯길을 걸어가며 십자가위에서 절규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숨막히듯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호소하는 모습은 뭔가 대장부 답지 않고 딱해 보일뿐입니다. 죽기싫은 죽음을 억지로 죽어간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며 또 십자가의 죽음이니 처참한 죽음인것 같습니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쏘크라테스의 죽음이 훨씬 더 훌륭하고 도에 통달한 대인의 죽음 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쏘크라테스의 죽음은 자신 이외에 아무 관계가 없는 죽음이였습니다. 그는 그저 그가 죽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는 죽는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괴로와 하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냥 죽어 갔습니다. 때문에 그의 죽음에는 자신이 살고 죽는다는 문제 밖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러한 고통스러운 죽으심을 당하는데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큰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죽는 가장 힘든 죽음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에수님이 인류와 완전히 동일화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전체가 당해야 하는 고통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쏘크라테스의 죽음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위대하고 큰 죽으심이 예수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외우고 있는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골고다 곧 헤골이라는 곳에서 그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 라는 죄패를 붙이고 강도들과 함께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보고를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수 없도다’ 라고 하였다고 기록 되었습니다.
 
2. 가운데 십자가
오늘 본문44절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같이 욕하더라’라고 간단히 기록을 했는데 그러나 누가복음23장에서는 한 강도는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라고 하였고 40절에는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 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것이니 이에 당연 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것은 옳지 않은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에 나를 생각 하소서” 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그 한편 강도를 향하여 “오늘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멸망받을자와 구원얻을자를 잘 구분해 놓은 십자가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왼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 자신과 심각하게 관계를 맺지않고 그냥 우습게 넘기는 사람의 결과이며 오른쪽 십자가는 가운데 십자가가 가지는 뼈아픈 구속의 도리에 대해서 절감하는 십자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앞에 있는 강대상의 십자가 형태는 교회내부 디자인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기본이 되는 의미요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앞에서 죄지은 인간들이 피흘리며 매달려야 하는 심판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의 자리이며, 죽음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철저히 하나님과의 단절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저주와 죽음, 절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십자가, 그것이 가운데 십자가입니다. 그것도 온 인류의 죄를 송두리째 짊어지셔야 했기에,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땀을 피처럼 떨구시며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찌하여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됩니까? 그것은 골고다 언덕의 가운데 십자가 자리에 섰을 때 비로소 부활의 아침을 내다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분명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나 아무 의미없이 지나칠때 그 사람은 인간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 모르는다는 것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의 생각처럼 고상하지도, 지혜롭지도, 도덕적으로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라는 절망의 자리는 우리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가운데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 우리는 결국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면면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죽을 죄인이라 할지라도, 집나간 탕자보다 더한 어리석고 누추한 존재라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금 이 시간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3. 못박힌 십자가
 
사도신경 고백에서 5번째는 ‘못 박혀’라는 말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왜 삽입되었겠습니까?
아마 이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는, 예수의 죽으심은 직접 자기의 육체에 심한 상처와 아픔을 당하면서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영어단어에 reality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못 박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그 reality를 말해주기 위하여 사용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손발에 못 박히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운 것인가를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생선을 썰다가 손가락을 칼로 살짝 베이면 굉장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은 잘 실감이 안 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가볍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고, 손발의 못 박히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좀더 체험적으로 ‘못 박힘’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때 때로 우리의 신앙은 reality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세상에 많은 교인들이 그저 머릿속에만 맴도는, 입술 위에서 머물다가 사라지는, 삶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가볍고 공허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동도 없고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짜로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신앙체험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신앙의 고백들과 입술의 찬양, 기도들이 그저 가볍기만 합니다. 가볍기 때문에 금방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분명히 감동이 있는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그 모든 신앙경험과 결단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곤 구습을 벗지 못하고 내내 그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들은 너무나 실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어떤 소설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진짜로 바로 당신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힌 채 피를 뚝뚝 흘려주셨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입에 침이 튀도록 강조하고 나면은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설교 열심히 하시네, 요즈음은 전에보다 설교가 좀 낳은 것 같애, 이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제가 십자가 설교를 실감나게 이야기한다 해도 안되는 사람은 안됩니다. 그 안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성령의 감동을 믿지않는 사람 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많은 피를 흘렸다고 한들 성령님의 감화감동이 작용하지 아니하신다면 어떻게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고 실감이 나겠습니까? 그것이 설교하는 사람의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이지 나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래, 날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라며, 믿으면 되는거 아니야, 마치 왼편강도처럼 가운데 십자가를 아무의미없이 처다보기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감화가 없기 때문이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갖고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결코 억지로는 눈물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 신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3-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 고전1:24
할렐루야 아멘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시92:1-5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추수 감사주일예배) 11-20-11 서 정 길 목사
 
예>투병중인 부인이 하나님께 매 달렸으나 고통은 점점 심해지기만 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해 그녀는 병원 벽에다가 낙서를 했습니다. "God is no where-" 그때 마침 믿음이 좋은 딸이 병실에 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그 글을 읽었습니다. "God is now here!"-어머니는 가운데 w를 뒷 글자에 붙이고 딸은 가운데 w를 앞 글자에 붙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 한가? 하는 측정은 그 사람의 마음에 평소에 감사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 할 수 없으면, 그는 아무리 많은 지식과 물질과 좋은 여러 가지를 지니고 있어도 불행한 사람이지만 감사 할 수 있으면 그는 아무것도 없을 찌라도 이미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1. 미국에서 처음 감사들
우리들이 오늘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 절기는 1608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국왕 제임스 1세와 영국교회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지 못하고 핍박을 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인들이나 목사님들이 보통 감사는 어려울수록 해야한다는 말씀들은 그말이 그냥 만들어진 말이 아니고 감사절이 가지는 원래 감사의 유래와 관련을 짓게 됩니다.
  1620년 9월 16일에 떠난 배가 약 9주만에 버지니아(virginia) 주에 도착 했는데 중도에 방향을 잃어서 12월 26일, 미국의 북동부의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영국 왕의 특허장(Kings Charter) 산하 지역의 테두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영국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이들은 독자적으로 살아 남아야 했고 이들을 이곳을 플리머스(Plymouth)라고 불렀습니다. (뉴욕을 중심하면 위쪽, 보스톤 아래쪽)
반 이상의 사람들이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 했지만 생존자들은 모두 신앙으로 힘든 역경을 이겨 나갔습니다. 그토록 힘든 시간이였지만 다음해 봄 메이 플라호가 영국으로 돌아 갔을때 놀랍게도 단 한명의 청교도들도 함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봄에 스쿠안토(Squanto )라고 하는 인디언에게 옥수수를 심는 법을 비롯해 비료 만드는 법, 짐승과 물고기를 잡는 법, 등을 배워서 그해 가을 즉 1621년 10월에 거둬들인 곡식을 바치며 하나님께 첫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이때 스쿠안토의 추장 마싸소이트(Massasoit)와 다른 인디언 동료들을 초청해 그들이 가지고 온 사슴과 칠면조고기와 필그림 여인들이 만든 채소및 과일 파이(Fruit pies)을 먹었습니다.
1979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추수감사절 날을 발표했지만 그 이후 여러 가지 이후로 추수감사절이 폐지 되기도 하고 또 비난 받기도 했지만 결국 1863년 링컨 대통령이 11월 넷째 목요일을 '국가적인 감사의 날'로 정해서 공식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부터 미국에서는 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이 되면 추수 감사절로 지켜오고 있으며 한해 동안 축복해 주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2. 구약성경속에서 감사
하지만 감사는 이미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중심해서 하나님께 드려진바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땅의 소산을 얻을때에 결국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맥추절 (레23: )과 초막절(레23: )을 통해서 봄과 가을 추수 후 그 수확을 가능케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이후에도 다윗은 "주의 성실하심"을 두고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 것을 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송하기를 기뻐했는데
-감사의 도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파와 수금과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드린 것입니다.
-감사의 이유로는 4절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행사를 인하여" 라고 했고
5절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라는 감격의 소리를 찬송하며 감사 했습니다.
 
3. 우리들의 감사
(1) 추수 감사절 예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교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시며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추수 감사절 예배를 통해 한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깨닫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오늘의 진정한 감사주일이 될 것입니다.
특히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어린이에게 우리가 먹는 음식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어 그 속에 담긴 농부의 정성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닫도록 하며 또한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와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어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2) 감사 헌물 드리기
감사 헌물 드리기는 주일 예배 때 모든 성도들이 헌금과 또 하나님께 드릴 곡식과 과일을 준비해 와서 각자 정성껏 준비해 온 곡식과 과일을 강단에 준비된 커다란 바구니 앞으로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직접 드린다는 마음으로 올려 놓습니다. 이를 통해 과실을 결실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추수하는 농부의 고마움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모아진 곡식과 과일은 예배가 끝난뒤 전 교인이 친교의 시간에 함께 먹거나 불우 이웃을 돕는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3)불우 이웃돕기
미국의 어떤 목사님은 감사주일에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Thanksgiving is not Thangskeeping!" 감사주일은 함께 나누고 주는 것이지 나만이 소유하려고 하거나 나만 간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많이 주셨으니 감사하자” 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세심한 부분까지도 늘 기억하시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스쿠안토 인디안들은 사슴과 칠면조를 가지고 와서 나누었고 필그림 여인들은 채소와 파이를 가지고 와서 나누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불우한 이웃을 찾아 주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먼저 우리 주위에 불우한 사람은 없는지 미리 살펴보고 그들을 위해 작은 정성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어 줄 뿐 아니라, 혹 불신자인 이웃이라면 주님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영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평소에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돕는 자세가 더욱 좋을 것입니다.
(4) 감사의 밤
각 교회에서는 추수 감사절 오후 프로그램으로 감사의 밤 행사를 갖습니다. 청교도들이 그들의 이웃인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추수한 곡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것처럼 전 교인은 물론 이웃과 친구, 잘나오지 않는 성도들을 초청해 준비한 떡과 음식 등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면 참 좋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를 주제로 한 촌극, 시낭송, 찬양 등을 통해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 될수 있으면 참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좀 바빠서 찬양대회를 12월로 연기 하였습니다.
5) 나의 모든 상황을 두고 감사
어떤 사람이 만약에 “아- 내가 원하는 자동차도 없네-- 내가 원하는 집도 없고-- 컴퓨터도 새로 나온것이 많은데 그것도 없고-- 내가 따를만한 좋은 지도자도 없어--단독 건물인 예배당과 친교실도 없어--나는 건강해 지고 싶은데 건강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한다면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이 진정 원하지 않는것에 대해서 집중한 셈이 됩니다.
  헬렌 켈러는 태어날 때부터 앞 못보는 소경으로 듣지도 못하는 귀머거리로 말도 못하는 벙어리로 살았습니다. 그의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내가 단 하루만 볼수 있다면 석양의 아름다움과 무지개의 영롱함을 보련다. 내가 단 하루만이라도 들을수 있다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련다 그리고 내가 단 하루만이라도 말할 수있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솜씨를 찬양 하련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적었는데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들 에게 이미 있는 것들을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더 좋은 일들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마워 하지 않는 마음을 내 뿜으로서 생각과 감정이 모두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질투나 원망이나 불만이나 부족하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더 좋은 것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새 차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헌 차에 대해서 고마워 해 보세요.
더 좋은 믿음을 가지고 싶으면 현재 구원 받은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 하십시오.
지금 현재 있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 하고 감사 한다면 그 현재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좋은 일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재물과 명예, 감탄을 자아내는 외모와 재능을 가졌다 해도
그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눈에 보이는 자랑 할만한 것이 없어도 그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치 숨겨진 보화를 가진 사람처럼 그는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감사의 조건임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삶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는 풍성한 생명을 여는 열쇠입니다.
감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아니 더 많이 느끼게 할 것입니다.
부정을 수용으로 바꾸고, 혼돈을 질서로, 혼란을 명쾌함으로 돌려세우게 됩니다.
한 끼 식사가 풍족한 잔치로 바뀔 것이고 평범한 집을 오순도순 정이 흐르는 가정으로,
나그네를 친구로 바꿀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감사와 나눔의 이유는 "우리 주님이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크신지요?"라는 마음을 가지면서 이 주일을 지낼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신 예수
눅23:13-25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11-13-11 서정길 목사
 
서론
 요즈음은 인터넷 세상입니다. 한국에 제가 아는 어떤 성도는 주일에 설교를 두 번 듣는 다고 합니다.
한번은 본교회 목사님의 설교, 한번은 오후에 집에서 인터넷으로, 제일 좋은 설교를 뽑아서 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본교회 목사님의 설교는 대충듣고 인터넷 설교는 재미있게 듣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왜 불행한가 하면 그는 분명히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터넷 설교는 아무래도 내가 골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입맛에 맛춘 나의 설교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좋은 습관은 아닙니다. 그 분의 설교가 참 좋아도 자기를 위해 기도할 수 없는 목사님으로 현장감 없는 공중메체가 됩니다. 특식보다는 맛이 없지만 가정에서 만든 음식을 선호해야 하듯 자기 담임 목사의 설교를 맛이 없어도 잘 경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꼭 두 번 들어야 한다면 둘다 정성들여서 듣는 것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신경은 크리스챤들이 무엇을 믿느냐? 하는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1)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2)외아들 예수님을 믿습니다.
3)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4)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믿습니다.
도표설명: 지금까지 우리의 고백
 
1. 본디오 빌라도 이해
오늘 본문에 나온 빌라도라는 인물은 그가 총독으로 재임시에 예수님께 잘못된 재판으로 말미암아 결국 2000년동안 수없이 많은 크리스챤들의 입에 의해 나쁜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좀 해 봅시다.
예수님 당시 로마에는 황제가 있고 그 밑에 13명의 총독들이 있어서 식민지를 맡아서 황제를 대신하여 통치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식민지 마다 그나라 왕이 있기를 했지만(유다에는 헤롯) 그 왕은 로마 황제가 임명한 왕으로써 황제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만 하는 사람으로써 말하기로 하면 로버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로마에 속해있는 나라들의 왕은 참 정치를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첫째 로마에 세금을 달라고 하는 대로 내어야만 했고 둘째, 어떤 죄인에 대해서 재판을 할수는 있었으나 사형결정은 왕이 내릴수 없고 총독이 내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빌라도 역시 로마인으로써 주후26년에 유대 총독이 되어 10년간 재직을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성격이 잔인하면서도 유약하여 뇌물을 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자신은 분명히 예수님의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계속 소리 지르는 유대인들의 난동에 견디다 못해 세수대야에 물을 떠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민요를 두려워 그냥 끌려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2. 예수님에게 씌어진 죄목
당시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죄목을 걸고 재판에 회부 하였습니다.
첫째:백성을 미혹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군중들의 모임을 그들은 정치적인 모임으로 해석을 하고 예수께서 군중을 미혹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슨 현상이든지 다 정치로 봅니다.
둘째: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시 백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예수에게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질문 하기를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치지 않는것이 옳습니까?” 하고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에 바쳐야 한다고 하면 유대인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 손가락질을 받게되고 만약에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로마의 법을 거스리는 자로 만들어 버리려는 계획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게 한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확실한 대답을 하였는데(눅20:) 이들이 모함하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사실이 아닌 고소거리였습니다.
셋째:자칭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왕은 로마황제가 임명을 하는법인데 예수님이 자칭으로 왕이라고 했으니 고소의 제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18장36절이하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보고“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을때 “내 나라는 이세상에 속한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3. 빌라도의 재판 결과
 예수님의 재판은 4번이였습니다. 1)산헤드린 공회 2)빌라도 3)헤롯 4)빌라도
1)눅23:14 본문에 빌라도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세번씩이나 예수의 무죄를 선언 하였습니다.
그런데 16절에 때려서 놓겠노라 고 하였습니다. 제가 좀 불만인 것은 죄가 없으면 무죄이며, 무죄이면 석방인데 왜 때리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러 백성에게 만족을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지금 빌라도가 지배하고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든 백성들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메시야 시대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문서로 현재 터어키의 성 소피아 사원에 소장되어 있는 ’빌라도의 고백서‘ 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 각하에게 ---->
“각하에게 문안 드립니다 최근 수년동안에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너무나 독특한 일이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까지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대로 소상히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발생한 사건을 보면 모든 다른 신들과는 조화될 수 없는 일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발레리우스. 플라슈스를 계승하여 유대 총독이 된 날을 저주하고 싶을 정도 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직위를 인수하고 큰 연회를 베풀것을 명하고 갈릴리의 영주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그의 부하 직원들을 초청 하였습니다. (생략) 제가 통치하는 도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은 가장 다스리기 힘든 도시라고 여겨 집니다. 백성들은 매우 거칠어서 저 자신 순간순간마다. 폭동의 두려움에서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실제적인 판단 보다는 백성들의 고함소리에 응하고 말았습니다.
본문 23절에“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사형에 내어 주었습니다.
당시에 성중에서 민란과 살인을 하고 옥에 갇힌 바라바 라는 사람이 잇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습관에 명절이 되면 죄인 한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둘중에 누구를 놓을수 있느냐? 했더니 사람들이 소리 지르기를 ‘빌라도를 놓기로 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백성들의 소란으로 인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되었습니다.
흔히 한국에서 쓴는 말로 ‘목소리 큰^^이 이긴다’ 라는 말과 똑 같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4. 우리 신앙생활의 적용
1)예수님은 역사적인 사실의 인물이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창조---------BC/AD-----------현재
BC--Before Christ (예수이전)
AD--Anno Domini(Latin) (예수이후)
after death?-
In the year of our Lord
History- 그(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스토리
 
도표설명: 역사속에 오신 주님을 실증
 
19세기 전반 까지만 해도 예수의 역사성에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가지만 해도 예수가 훌륭한 도덕가인가? 아니면 신의 아들인가? 하는 문제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등장을 하자 곧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로마제국의 권한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동시에 그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통을 받은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며 동시의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허공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분명한 역사속에 고통을 받으시고 사형을 받으시기 까지 이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믿습니다.
2)예수님은 끝까지 인간이 걸어간 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인간적으로 볼때 안타깝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하고 억울 하기도 합니다.
처녀의 몸에서 나시고 그러한 무서운 시험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어째서 그까짓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의 고소로 빌라도에게 고통을 받으시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5,000명을 먹일수 있으신 능력의 예수님, 광풍이 불어 파도가 칠때 한마디 호령으로 잔잔해진 사건, 각종병자의 고침과 죽은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께서 어째서 그 보잘 것 없고 하나님도 섬기지 않는 이방인인 빌라도의 법정에서 그것도 부당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하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인간 모습 그대로 가지셨으니 우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성도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아픔과 고통과 고난을 천백번 이해하시고 우리의 삶에 위로자가 되시는 것을 믿으며 살아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3)우리는 고난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낙심이 아니라 오히려 지상의 권한보다 하나님의 권한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세계 통치와 인간 세계의 통치의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 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다스릴때 총칼과 법과 폭력과 술수를 최대한으로 사용 합니다. 그래서 약자를 누르고 고문을 가하고 중상 모략을 해서라도 권세를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은 원수가 생기게 되고 그리고 불안과 공포와 초조와 전쟁 비극이 끊일줄 모르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이와는 정 반대로 공의 와 자비로만 다스립니다. 우주와 세계와 인간사회에 삶의 질서를 만드시고 잘못을 범하였을때 회개와 재생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길이 참으시고 새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이 지상의 세계가 잠시 동안은 승리 하는것 같습니다. 로마제국 안에 있는 권한 그리고 그 아래있는 한 총독에 의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로마는 1000년을 즐겼다고 하지만 사실 그 세력은 불과 300 밖에 되지 못하였다고 역사가들은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는 인간의 세력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결국은 로마의 지배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이세상을 2000년 동안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수 없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이 예수를 지배 했다고 해도 결코 3일을 넘길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덤에 꼭 삼일만 계셨기 때문 입니다.
4)예수님의 고난의 길은 신자의 길을 미리 가르쳐준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교훈 하실때 눅13:24“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교회사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이 거룩한 발자취를 따라간 사람들에 의해 발전 되었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서 죽어가신 믿음의 선조들에 의해서 복음의 사역은 확장 되었고---
미국의 건국도 예수님을 따른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한국의 대원군과 일제의 악정 속에서 선교의 불꽃이 피어 한국교회의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네로황제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이 경기장으로 끌려가 맹수의 밥이 되면서도 찬송을 불렀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로마의 한 행정관은 굳굳히 믿음을 지키고 순교당하는 기독교인을 향해서 “저 미친 사람들을 보라” 고 하였는데 그 이후 역사가들은 이렇게 기록 합니다.
“그때 미친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네로황제였다”
                                                                                    할렐루야 아멘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사도신경 강해 4)
마1:18-25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11/6/11서 정 길 목사
서론/본문이해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교제를 하였지만 아직 아무 관계도 이루지 않은 상태이었습니다.
25절에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 하였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마리아가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나사렛을 방문해 보니 마리아와 요셉이 살던 집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 동네는 그리 큰 동네가 아니였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으니 이제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저 여자와 조용히 끊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에 “그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라는 것입니다.
24절에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 왔다”고 했습니다.
1.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이해
목회자는 건강해도 목회에 도움이 되고 몸에 병이 들어도 목회에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가지는 특수성이라고 생각 합니다.
지 지난 주일 저는 머리가 몹시 아팟었습니다. 주간 중에 파크에 걸으면서 옛날 하던대로 머리에 손을 얹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게 아픔의 번뇌를 주는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소리를 쳤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머리가 훨씬 가벼워 졌습니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또 머리가 아파옵니다.
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확신을 가지고 명령을 했더니 그때부터 머리가 약 1주간동안 아프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 나았다 보다 했더니 한주간이 지나서 또 머리가 또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그동안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부족했던 자신을 발견했고 좀더 겸손해 졌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느꼈던 것은 항상 주님께 기도를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기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사실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병이 치유되는 일을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통에 빠진 사람이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평화를 얻는 일은 더 더욱 귀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병원을 통해 병을 고치거나 혹 신앙으로, 또 기도로 병을 고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우리가 병이 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그분께 나의 모든 생애를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성경에 욥은 아무 이유없이 재산을 잃고 또 몸이 거의 만신창이가 되도록 아픈 고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하면서 절규하였습니다. 그런데 고통의 여정을 통과하면서 시간이 흐른 다음, 어느 단계에서 회복이 이루어 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회복함에 있어서 그의 치유에는 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욥의 고통이 이루어지는 과정중에 욥기의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통속에서 “내가 이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들어 알고 있고 믿고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눈으로 봅니다”가 가장 큰 핵심이 되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그 사건을 통해서 사람에게 병이 나았다 낫지 않았다 하는 문제는 두 번째가 되고 제일 중심은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주님은 결코 어떤 상황일지라도 나를 버리시지 않으신다” 고 하는 그 확신입니다.
그 확신 중에 사는 동안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잊지않으시고 아픔의 현장에서 건저 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의 사람이 작은 고통이든, 큰 고통이든 그 고통에서 다시 회복해서 주님을 의지하며,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 재산을 되찾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그런 일은 모두다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집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서 치료를 받는 것은 정상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기도해서 성령의 역사로 치료를 받았다고 하면 그 일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어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바탕에서만 아니라 비 합리적인 것 같아 보이고 또 비과학적인 것 같은 사건속에서도 얼마든지 현실을 변화 시키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2.동정녀 탄생을 바르게 보는 관점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는 사실을 인간적인 각도에서 보면 절대로 해결 되지 않습니다.
사건을 일으킨 하나님 편에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주동된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들은 이 사건을 비 과학적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비과학적이 아니라 초과학적인 사건입니다.
사실 일찍이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고 무에서 유를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고백 하였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다음 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권을 이미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백을 진실로 바로 한 사람은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믿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으로의 잉태’ 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바탕이 있는냐?~~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제가 20초반에 부산에 살때에 하루는 어떤 제 친구 사무실에 놀러 갔었습니다. 친구와 같이 대화를 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려서 문을 열어보니 어떤 신사 한 분이 들어와서 대화를 같이 하고자 합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전도자였습니다. 그것을 알아채린 제 친구가 먼저 말하기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처녀가 혼자 아이를 낳았다는 성경 이야기를 믿으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저는 그 말을 받아서 “나는 그것이 의심되지 않거든요. 이것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 “그게 바로 선택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동정녀 탄생에 대한 것을 설명하려고 애 쓰지만 저는 사실 의심의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냥 믿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중의 은혜라고 생각 합니다.
저에게 왜 의심이 없는가 하면, 하나님의 신뢰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혹시 여러분 중에 처녀탄생, 물위로 걸으시는 예수, 홍해 갈라지는 사건, 노아 홍수 사건 등등이 믿어지지 않고 의심이 생기면 억지로 믿으려고 애쓰시지 마시고 의심의 과정이라는 틈사이를 넘어서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은 내가 철저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먼저 마음 중심에 먼저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의심이 안개걷히듯 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의심이라는 그릇이 확신이라는 모습으로 둔갑되는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3.중보자의 필요성과 자격
1)성령으로 잉태 되어야 할 그 필요성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 되어야 할 이유를 살펴 봅시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 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의 혈통으로 태어 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혈통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고 마리아의 몸만 빌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를 숭배할 아무 필요도 우리는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은 남녀 양성의 생리적인 결합에 의하여 출생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야 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저도 가끔 중매를 합니다만 제일 잘 되는 중매가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양쪽을 내가 잘 알 때입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주례를 요청해서 거절 한 적이 한번 있습니다. 제가 얼굴도 보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되면 중매가 좀 쉽고 주례도 가능 합니다. 그러나 전혀 보지 않은 사람을 중매 하기란 참 힘이 듭니다. 양쪽을 충분이 이해 할뿐 아니라 양쪽의 성품을 지녀야만 중보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람은 어떻습니까?
옳습니다. 인간은 이미 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마13:38-마귀의 자녀
눅19:10 잃어 버린자
엡2:2-불순종의 아들들
엡2:3-진노의 자녀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의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아무리 하드웨어가 좋아도 손상된 cd나 chip은 컴퓨터를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가 없습니다. 회사에서 새로 만들어진 깨끗한 것이라야 프로그램을 진행 시켜 나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땅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조상 아담으로 인하여 손상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하였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혈통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직접 잉태 되어야만 했습니다.
2)성령으로 잉태 되어야 중보자의 자격이 됩니다.
예수님이 중보자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렸으니 인간이고 성령으로 잉태 했으니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양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삼는 일에 매우 적절한 중매자인 것입니다.
딤전 2:5“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예수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예>월가 점령시위대들은 감추어진 경제 구조적인 악을 감추고 특권층 1%가 잘사는 비밀스런 사회를 열어서 함께 살자는 운동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내막을 은근히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고 나타내신 일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이 감추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들어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급기야, 돈으로도 안되고, 명예로도 안되고, 권세로도 안되고, 힘으로도 안되고, 인간의 선한 공로로도 안되는 인간구원의 문제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오심을 환영하고 마음에 영접 함으로 비밀이 열리고 근원적인 인간의 죄가 해결되는 일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지는 이러한 믿음은 단순한 신앙의 논리에 대해서 긍정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하는 이 일은 저와 여러분의 분초로 달라지는 삶의 현장에 면밀하게 능력을 얻는 힘이 됩니다.
언제 말입니까? 지금입니다.
지금 현재 이 자리에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역사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이러한 신앙고백이 그냥 주문을 외우는 정도가 아니고, 어떤 이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플 때, 괴로울 때, 마음이 외롭고 적적할 때, 화가 날 때, 여러분의 속에 계신 성령께서 생각나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더 나아가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세상 사람들이 계산해서 뽑아 낼수 없는 기이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합시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사도신경 강해 3)
요3:14-18,민21:4-9
스프링필드 중앙교회(성찬예식 있는 날) 10/30/11 서 정 길 목사
 
서론
오늘은 말틴 루터를 중심해서 천주교의 부패로부터 개혁되어 나온 종교개혁주일 494돌입니다. 개혁은 단순이 바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일입니다. 말씀 중심어여야 할 교회가 전통으로, 은혜 중심이어야 할 교회가 공로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할 교회가 마리아와 교황의 권위를 함께 공존하는 종교타락에 의해서 기독교가 창시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창시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가질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일이었다고 생각 됩니다. 저는 이 귀한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초점으로 말씀을 증거할 수 있어서 참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예>장님의 간증한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장님은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며 살았다가 나중에 예수 안에서 축복받고 새길을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인즉 ‘길거리에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수없이 사람이 많이 지나갑니다.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발자국소리에 귀가 아주 예민해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천히 걷고 어떤 사람은 빨리 걷는다. 한참 듣노라면 나중에는 발자국소리를 들으면 이사람은 직업이 무엇일것이다 라는 짐작까지 한다. 나중에는 발자국 소리를 통해서 동냥을 해줄 사람인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인지 알수 있었다. 보통 동냥을 하는 사람의 발자국소리는 천천히 일정한 박자로 걷는 사람보다 빨리 걷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돈을 던지는것이 아니라 총총걸음으로 걸어 자기앞을 지나친다. 그러다가 발을 멈춘다. 이 멈추는 소리가 두세 발자국 멀리서 나는데 그 사람은 틀림없이 다시 돌아와서 돈을 떨어 트린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체로 “흠- ” 하는 약간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무슨 소리 일까요 약간의 안도의 숨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알게도 모르게도 많이 죄를 짓게 되는데 그는 지금 장님에게 동전 한잎을 던지면서 그의 지은 죄를 다소 라도 사함 받았으리라는 기대의 한숨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안다. 내가 이렇게 수없이 많이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아픔을 주고 하는 많은 지은죄에 대해서 이 동냥이 과연 1000분지 일 정도 사해질지---’ 의심되는 일 말이다.
얼마나 인간이 죄에 민감하며 죄 의식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는지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이 장님거지의 경험대로 사람들은 미미하게 막연한 구원과 죄에 대한 용서를 상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용서와 구원은 상상이 아닙니다. 
1. 불신 (이세상)
 민21:4-9 까지 보면(수정캐기 지난 목요일, 27일자)
“이스라엘 백성, 그들은 에돔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산에서 부터 홍해길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길을 걷는 동안에 마음이 몹시 조급 하였습니다. 너무 먼길을 둘러서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것도 없다 마실것도 없다. 이 보잘것 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그러자
민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자가 많은지라.”
말씀대로 주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 뱀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 하였습니다.
민21: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 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하였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민수기 21:8-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땅의 모든 인류는 각자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 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에게 원망도 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4-1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독생자가 과연 누구입니까? 
2. 역사적 정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1)하나님 아들
2000년간 피를 흘려 가면서 하나님 아들에 대해서 논쟁을 해 왔습니다.
a.오리겐(Origenes, Adamantius 185-254)-유출설을 말합니다.-물통에 물이 많으면 넘쳐 흐른다. 그래서 온 우주가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 들어 왔다. 처음에 유출된 것이 예수님이고 그다음이 우주다.
b.아리우스(Arius 280-336)-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예수님은 피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가?
c.아다나시우스(Athanasios, Magnus 259-373)-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다.
그 이후 4세기 말 기원후 379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신학자 150명이 모여 교리를 확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모든 시간 이전에 독생 하시고 ---하나님으로 부터오신 하나님이시다” 로 결론 지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요13: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즉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시 한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하나님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육체를 가지지 않았지만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셔야 하므로 예수님을 통해 이땅에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2)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란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야란 원래 예수님 당시에 평민들이 쓰던아람어인데 해석은 “기름부음을 받은자”란 뜻으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고 불려졌습니다.
원래 ‘기름 부음을 받은자’는 구약에서 대제사장에게나 선지자나 왕에게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왕의 통치가 백성의 구원자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왕의 통치는 아무리 훌륭해도 부분적이 였고 나중에는 인류전체를 완전하게 구원할 자를 백성들이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왕일지라도 한시대에 조금 역할을 할뿐 영원한 구원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몇천년동안 기다려 오던이가 바로 메시야 입니다. 이 메시야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분 이여야 했고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 편에서 오셔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뜻을 모아 세워본 왕이나 예언자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완전하지 않았고 성품으로나 자격으로도 완전하지 않았고 다만 완전한 메시야는 하늘에서 보낸 자이어야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였습니다.
예>자동차에 물고기 모양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을 봅니다. 히스토리는 이러합니다. 초대교회에 로마의 핍박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끼리 서로 만납니다. 그럴때 그리스도인이라고 서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데 잘못하다가 붙잡히면 그대로 사형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끼리 서로암호를 주고 받은 것인데 그것을 물고기를 땅에다가 그리면 상대방이 그리스도인인줄 알고 예배장소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물고기안에 쓰여진 것은 헬라어 물고기를 표현하는 익크투스(Ichthus)인데 거기에는 다섯 글자의 헬라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첫글자는 I- 헬라어 예수, 2) X-그리스도 3) O-하나님 4) Y-아들 5) C- 구주
읽을때는 야소스(Yasous) 크리스토스(Christos) 데오(Theou) 히오스(Hyos) 소터(Soter)-(발음만 이렇게 됩니다.) 이 첫글자들을 붙여놓으면 ‘물고기’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 첫글자들의 하나하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주>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들에게 보내는 확실한 메시지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 는 것입니다.
3. 믿음
  아는 것 과  믿는 것
1. 하나님 G0d(창조주, 나는 피조물) yes
2. 죄 sin(아담의 원죄가 내 속에) yes
3. 구원 salvation의 길 (하나님의 계획) yes
4. 예수그리스도 Jesus (죄를 대속할 분) yes
5. 영벌eternal punishment(永罰)과 영생eternal life(永生) yes
   (믿음으로 천국, 불신지옥)
 1)복음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을 바로, 그리고 많이 아는 것으로 출발된다. 물론 많이 안다고 해서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복음의 메세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수가 없습니다. 그 기본적인 메세지가 무엇입니까?
가.하나님을 아는것입니다.
나.죄를 아는것입니다.
다.구원을 아는 것입니다.
라.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마.영벌과 영생(즉 천국과 지옥)을 아는 것입니다.
예>영화 이기풍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기풍이가 원래싸움을 좋아하고 술 좋아하였던 사람인데 1890년 평양 서문통 네거리에 웬 눈이 파란 사람이 전도하니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짓 한다고 돌을 던져서 턱에 피가 흘렀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하지않고 보기에 이상하다고 그 짓을 했습니다. 나중에 한국 사람한테 전도받고 변화받아 마펫선교사를 찾아가서 사과를 하고 가장 힘든 제주도에 선교사로 지원하여 갔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게 된 이유
가.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므로써 온세상을 엿세동안 창조 하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지었습니다.
나.그런데 그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그만 범죄에 빠지게 되어 모든 인류가 범죄한 백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다.그러나 하나님은 또 인간을 사랑하시사 많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율법을 지키지를 못했고 그 율법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아는 것으로 교만하고 말았습니다.
라. 하나님은 또 인간을 사랑하시사 선지자들을 보내사 백성들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촉구 하였으나 인간은 그 예언자를 때리고 죽였습니다.
  마. 하나님은 또 다시 인간을 사랑하시사 마지막으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습니다.
2)믿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다.
그래서 그를 믿는자마다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죄를 깨끗이 씻고 용서함을 받고 영생얻도록 하였습니다.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요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10: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 가리라 하시니라.”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 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이름 예수!
그를 알고,
그를 처다보고,
그를 마음에 믿고,
어떤 모양으로든 그를 통해 경험되어질 때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약속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