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일 수요일

오늘의 메시지 11월 (지난주 설교전문)


죽음에서 새 생명에로(사도신경 강해 6)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시고”
마27:32-44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11-27-2011 서 정 길 목 사
 
현장의 문제:

 
미국 공화당 차기 대통령 경선 주자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가 지난 11월 9일에 방송 토론회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세 개의 부처를 없애고 작은 정부를 구현하겠다고 하는 중 새 공약을 소개하면서 첫째 상무부, 두 번째는 교육부 그리고 음 음 하였습니다. 노트를 뒤적이고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더듬거리다가 53초가 흘러 갔습니다. 미국 언론은 경선 첫 관문인 토론회에 자신의 새 공약 세 번째가 생각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지지율이 한층 내려 갔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신문에 났습니다. 그 세 번째는 에너지부였습니다. 우리는 잠고대 중에서라도 잊지 않고 외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입니다.
강해
1. 고백하는 신앙(서론)
2.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3.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4.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 에게 나시고
5.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6.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1. 죄와 죽음
 
어느날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에게 묻습니다.“선생님 귀신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선생님 죽음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죽음 이후에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말해 주세요” 공자가 대답 하기를 “살아 있는 동안에 일도 다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죽은 이후를 알고 귀신의 정체를 알겠소 방법은 하나밖에 없소 자네와 내가 지금 죽어 보는 방법이요”
이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부요했든, 가난했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프리카에 살든, 어떤 최고의문명 도시에 살든 모두모두 죽음이라는 종착점이 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죽음도 참 종류가 많습니다. 그런데 죽음 중에 죄인으로 감옥에 살다가 일정한 날을 받아 처형되는 사형수의 죽음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중에 로마시대에 십자가의 죽음은 정말로 비참했습니다. 당시에 가장 모질고 최고로 극악 무도한 죄인에게 내리는 것이 십자가 형입니다. 이형벌은 본래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 죽이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땅은 본래 신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쁜 죄인을 땅에다 놓고 죽이면 땅이 더러워 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중에 매달은 시체를 나중에라도 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어서 새들이 띁어 먹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방법입니다. 이런 십자가 형을 로마 사람들이 도입을 하여 당시 죄인들에게 적용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인에게는 십자가 형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그들의 노예나 식민지 사람에게만 내리는 형벌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잔인한 로마 군인들이라도 십자가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면서 만일 황제가 식사할때 누군가가 십자가 이야기를 했다가는 당장 끌어내어 매질을 가할 정도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한번 달리는 것을 본 사람은 평생 잊을 수가 없는 악몽으로 그 광경이 아주 무섭고 비참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밤에 미국 백악관과 CTU 라고 해서 테러분자들을 대응하는 기관들의 움직임을 소상히 알려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24시,2부 16번의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 됩니다. 사실은 중동 몇나라가 주도한 것이 아니고 “제2의 물결” 이라는 아주 고약한 테러단체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핵 폭탄을 터트리는 일입니다. 특수임무를 띤 잭 바우어가 팀을 이끌고 그 핵 폭탄 장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발견 했을때에 이미 타이머가 작동되기 시작했습니다. 훌륭한 기술자를 동원해서 그것을 아무리 헤체할려고 해도 헤체할 방법이 없습니다. 할수 없이 두가지 방법이 제시 됩니다. 하나는 물속에 그 비행기를 집어 넣는 일이고 하나는 라스베가스 가까운 사막 중 움푹진 곳에서 터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닷물속에 넣으면 수많은 물고기가 오랜 세월 살아 갈수 없고 나중에는 서서히 육지에까지 그 핵 방사능이 올라오기 때문에 피해가 상당하다는 것이고 둘째 사막 움푹 파인곳에 잘 뭍어 터트리면 인명피해를 거의 없앨수 있는 제안인데 문제는 그 비행기를 한 사람이 타고 가장 깊은 계곡에 정확하게 안착해서 터트려야 하기 때문에 조종사는 그 자리에서 핵 폭탄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CTU 특별요원으로 가장 중요한 임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는 주인공 잭바우어가 지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과 전화를 하면서 마지막 딸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너를 사랑한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울었습니다. 아무리 영화지만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던져서라도 수백만명의 생명을 건지려고 하는 그 위대함에 감동된 것입니다. 동시에 저는 눈물을 닥으면서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하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CTU 현장 책임자가 업무 수행중에 방사능에 감염되어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그 비행기에 몰래타서 자기는 이제 죽어가는 몸이니 자기가 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잭 바우어 한테는 낙하산을 주고 내리라고 하고 자신이 그 비행기를 운전해서 목적지에서 핵 폭발을 시키면서 죽어 갔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쏘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비교해 놓은 이야기를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생각하기 보다는 쏘크라테스의 죽음이 아주 멋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죽음을 알게 될때 제자들이 그가 도망칠수 있도록 간수들을 다 매수 해 놓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도망을 칠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도망칠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권유를 거절하고 오히려 음독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독 자살로 매우 고요하게 조용하게 태연자약하게 그리고 자는것처럼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제자들을 꾸짖으며 이웃집 친구에게 빚진 닭 한마리를 갚아 달라고 최후의 부탁을 하고 죽어 갔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당당하면서도 편안한 죽음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은 너무나도 비참한 죽음이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형의 틀을 지고 눈물의 고갯길을 걸어가며 십자가위에서 절규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숨막히듯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호소하는 모습은 뭔가 대장부 답지 않고 딱해 보일뿐입니다. 죽기싫은 죽음을 억지로 죽어간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며 또 십자가의 죽음이니 처참한 죽음인것 같습니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쏘크라테스의 죽음이 훨씬 더 훌륭하고 도에 통달한 대인의 죽음 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쏘크라테스의 죽음은 자신 이외에 아무 관계가 없는 죽음이였습니다. 그는 그저 그가 죽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는 죽는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괴로와 하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냥 죽어 갔습니다. 때문에 그의 죽음에는 자신이 살고 죽는다는 문제 밖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러한 고통스러운 죽으심을 당하는데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큰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죽는 가장 힘든 죽음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에수님이 인류와 완전히 동일화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전체가 당해야 하는 고통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쏘크라테스의 죽음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위대하고 큰 죽으심이 예수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외우고 있는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골고다 곧 헤골이라는 곳에서 그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 라는 죄패를 붙이고 강도들과 함께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보고를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수 없도다’ 라고 하였다고 기록 되었습니다.
 
2. 가운데 십자가
오늘 본문44절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같이 욕하더라’라고 간단히 기록을 했는데 그러나 누가복음23장에서는 한 강도는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라고 하였고 40절에는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 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것이니 이에 당연 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것은 옳지 않은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에 나를 생각 하소서” 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그 한편 강도를 향하여 “오늘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멸망받을자와 구원얻을자를 잘 구분해 놓은 십자가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왼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 자신과 심각하게 관계를 맺지않고 그냥 우습게 넘기는 사람의 결과이며 오른쪽 십자가는 가운데 십자가가 가지는 뼈아픈 구속의 도리에 대해서 절감하는 십자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앞에 있는 강대상의 십자가 형태는 교회내부 디자인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기본이 되는 의미요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앞에서 죄지은 인간들이 피흘리며 매달려야 하는 심판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의 자리이며, 죽음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철저히 하나님과의 단절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저주와 죽음, 절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십자가, 그것이 가운데 십자가입니다. 그것도 온 인류의 죄를 송두리째 짊어지셔야 했기에,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땀을 피처럼 떨구시며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찌하여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됩니까? 그것은 골고다 언덕의 가운데 십자가 자리에 섰을 때 비로소 부활의 아침을 내다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분명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나 아무 의미없이 지나칠때 그 사람은 인간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 모르는다는 것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의 생각처럼 고상하지도, 지혜롭지도, 도덕적으로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라는 절망의 자리는 우리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가운데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 우리는 결국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면면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죽을 죄인이라 할지라도, 집나간 탕자보다 더한 어리석고 누추한 존재라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금 이 시간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3. 못박힌 십자가
 
사도신경 고백에서 5번째는 ‘못 박혀’라는 말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왜 삽입되었겠습니까?
아마 이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는, 예수의 죽으심은 직접 자기의 육체에 심한 상처와 아픔을 당하면서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영어단어에 reality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못 박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그 reality를 말해주기 위하여 사용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손발에 못 박히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운 것인가를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생선을 썰다가 손가락을 칼로 살짝 베이면 굉장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은 잘 실감이 안 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가볍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고, 손발의 못 박히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좀더 체험적으로 ‘못 박힘’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때 때로 우리의 신앙은 reality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세상에 많은 교인들이 그저 머릿속에만 맴도는, 입술 위에서 머물다가 사라지는, 삶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가볍고 공허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동도 없고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짜로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신앙체험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신앙의 고백들과 입술의 찬양, 기도들이 그저 가볍기만 합니다. 가볍기 때문에 금방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분명히 감동이 있는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그 모든 신앙경험과 결단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곤 구습을 벗지 못하고 내내 그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들은 너무나 실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어떤 소설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진짜로 바로 당신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힌 채 피를 뚝뚝 흘려주셨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입에 침이 튀도록 강조하고 나면은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설교 열심히 하시네, 요즈음은 전에보다 설교가 좀 낳은 것 같애, 이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제가 십자가 설교를 실감나게 이야기한다 해도 안되는 사람은 안됩니다. 그 안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성령의 감동을 믿지않는 사람 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많은 피를 흘렸다고 한들 성령님의 감화감동이 작용하지 아니하신다면 어떻게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고 실감이 나겠습니까? 그것이 설교하는 사람의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이지 나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래, 날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라며, 믿으면 되는거 아니야, 마치 왼편강도처럼 가운데 십자가를 아무의미없이 처다보기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감화가 없기 때문이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갖고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결코 억지로는 눈물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 신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3-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 고전1:24
할렐루야 아멘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시92:1-5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추수 감사주일예배) 11-20-11 서 정 길 목사
 
예>투병중인 부인이 하나님께 매 달렸으나 고통은 점점 심해지기만 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해 그녀는 병원 벽에다가 낙서를 했습니다. "God is no where-" 그때 마침 믿음이 좋은 딸이 병실에 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그 글을 읽었습니다. "God is now here!"-어머니는 가운데 w를 뒷 글자에 붙이고 딸은 가운데 w를 앞 글자에 붙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 한가? 하는 측정은 그 사람의 마음에 평소에 감사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 할 수 없으면, 그는 아무리 많은 지식과 물질과 좋은 여러 가지를 지니고 있어도 불행한 사람이지만 감사 할 수 있으면 그는 아무것도 없을 찌라도 이미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1. 미국에서 처음 감사들
우리들이 오늘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 절기는 1608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국왕 제임스 1세와 영국교회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지 못하고 핍박을 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인들이나 목사님들이 보통 감사는 어려울수록 해야한다는 말씀들은 그말이 그냥 만들어진 말이 아니고 감사절이 가지는 원래 감사의 유래와 관련을 짓게 됩니다.
  1620년 9월 16일에 떠난 배가 약 9주만에 버지니아(virginia) 주에 도착 했는데 중도에 방향을 잃어서 12월 26일, 미국의 북동부의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영국 왕의 특허장(Kings Charter) 산하 지역의 테두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영국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이들은 독자적으로 살아 남아야 했고 이들을 이곳을 플리머스(Plymouth)라고 불렀습니다. (뉴욕을 중심하면 위쪽, 보스톤 아래쪽)
반 이상의 사람들이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 했지만 생존자들은 모두 신앙으로 힘든 역경을 이겨 나갔습니다. 그토록 힘든 시간이였지만 다음해 봄 메이 플라호가 영국으로 돌아 갔을때 놀랍게도 단 한명의 청교도들도 함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봄에 스쿠안토(Squanto )라고 하는 인디언에게 옥수수를 심는 법을 비롯해 비료 만드는 법, 짐승과 물고기를 잡는 법, 등을 배워서 그해 가을 즉 1621년 10월에 거둬들인 곡식을 바치며 하나님께 첫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이때 스쿠안토의 추장 마싸소이트(Massasoit)와 다른 인디언 동료들을 초청해 그들이 가지고 온 사슴과 칠면조고기와 필그림 여인들이 만든 채소및 과일 파이(Fruit pies)을 먹었습니다.
1979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추수감사절 날을 발표했지만 그 이후 여러 가지 이후로 추수감사절이 폐지 되기도 하고 또 비난 받기도 했지만 결국 1863년 링컨 대통령이 11월 넷째 목요일을 '국가적인 감사의 날'로 정해서 공식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부터 미국에서는 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이 되면 추수 감사절로 지켜오고 있으며 한해 동안 축복해 주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2. 구약성경속에서 감사
하지만 감사는 이미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중심해서 하나님께 드려진바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땅의 소산을 얻을때에 결국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맥추절 (레23: )과 초막절(레23: )을 통해서 봄과 가을 추수 후 그 수확을 가능케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이후에도 다윗은 "주의 성실하심"을 두고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 것을 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송하기를 기뻐했는데
-감사의 도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파와 수금과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드린 것입니다.
-감사의 이유로는 4절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행사를 인하여" 라고 했고
5절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라는 감격의 소리를 찬송하며 감사 했습니다.
 
3. 우리들의 감사
(1) 추수 감사절 예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교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시며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추수 감사절 예배를 통해 한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깨닫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오늘의 진정한 감사주일이 될 것입니다.
특히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어린이에게 우리가 먹는 음식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어 그 속에 담긴 농부의 정성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닫도록 하며 또한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와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어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2) 감사 헌물 드리기
감사 헌물 드리기는 주일 예배 때 모든 성도들이 헌금과 또 하나님께 드릴 곡식과 과일을 준비해 와서 각자 정성껏 준비해 온 곡식과 과일을 강단에 준비된 커다란 바구니 앞으로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직접 드린다는 마음으로 올려 놓습니다. 이를 통해 과실을 결실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추수하는 농부의 고마움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모아진 곡식과 과일은 예배가 끝난뒤 전 교인이 친교의 시간에 함께 먹거나 불우 이웃을 돕는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3)불우 이웃돕기
미국의 어떤 목사님은 감사주일에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Thanksgiving is not Thangskeeping!" 감사주일은 함께 나누고 주는 것이지 나만이 소유하려고 하거나 나만 간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많이 주셨으니 감사하자” 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세심한 부분까지도 늘 기억하시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스쿠안토 인디안들은 사슴과 칠면조를 가지고 와서 나누었고 필그림 여인들은 채소와 파이를 가지고 와서 나누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불우한 이웃을 찾아 주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먼저 우리 주위에 불우한 사람은 없는지 미리 살펴보고 그들을 위해 작은 정성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어 줄 뿐 아니라, 혹 불신자인 이웃이라면 주님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영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평소에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돕는 자세가 더욱 좋을 것입니다.
(4) 감사의 밤
각 교회에서는 추수 감사절 오후 프로그램으로 감사의 밤 행사를 갖습니다. 청교도들이 그들의 이웃인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추수한 곡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것처럼 전 교인은 물론 이웃과 친구, 잘나오지 않는 성도들을 초청해 준비한 떡과 음식 등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면 참 좋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를 주제로 한 촌극, 시낭송, 찬양 등을 통해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 될수 있으면 참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좀 바빠서 찬양대회를 12월로 연기 하였습니다.
5) 나의 모든 상황을 두고 감사
어떤 사람이 만약에 “아- 내가 원하는 자동차도 없네-- 내가 원하는 집도 없고-- 컴퓨터도 새로 나온것이 많은데 그것도 없고-- 내가 따를만한 좋은 지도자도 없어--단독 건물인 예배당과 친교실도 없어--나는 건강해 지고 싶은데 건강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한다면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이 진정 원하지 않는것에 대해서 집중한 셈이 됩니다.
  헬렌 켈러는 태어날 때부터 앞 못보는 소경으로 듣지도 못하는 귀머거리로 말도 못하는 벙어리로 살았습니다. 그의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내가 단 하루만 볼수 있다면 석양의 아름다움과 무지개의 영롱함을 보련다. 내가 단 하루만이라도 들을수 있다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련다 그리고 내가 단 하루만이라도 말할 수있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솜씨를 찬양 하련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적었는데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들 에게 이미 있는 것들을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더 좋은 일들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마워 하지 않는 마음을 내 뿜으로서 생각과 감정이 모두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질투나 원망이나 불만이나 부족하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더 좋은 것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새 차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헌 차에 대해서 고마워 해 보세요.
더 좋은 믿음을 가지고 싶으면 현재 구원 받은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 하십시오.
지금 현재 있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 하고 감사 한다면 그 현재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좋은 일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재물과 명예, 감탄을 자아내는 외모와 재능을 가졌다 해도
그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눈에 보이는 자랑 할만한 것이 없어도 그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치 숨겨진 보화를 가진 사람처럼 그는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감사의 조건임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삶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는 풍성한 생명을 여는 열쇠입니다.
감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아니 더 많이 느끼게 할 것입니다.
부정을 수용으로 바꾸고, 혼돈을 질서로, 혼란을 명쾌함으로 돌려세우게 됩니다.
한 끼 식사가 풍족한 잔치로 바뀔 것이고 평범한 집을 오순도순 정이 흐르는 가정으로,
나그네를 친구로 바꿀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감사와 나눔의 이유는 "우리 주님이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크신지요?"라는 마음을 가지면서 이 주일을 지낼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신 예수
눅23:13-25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11-13-11 서정길 목사
 
서론
 요즈음은 인터넷 세상입니다. 한국에 제가 아는 어떤 성도는 주일에 설교를 두 번 듣는 다고 합니다.
한번은 본교회 목사님의 설교, 한번은 오후에 집에서 인터넷으로, 제일 좋은 설교를 뽑아서 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본교회 목사님의 설교는 대충듣고 인터넷 설교는 재미있게 듣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왜 불행한가 하면 그는 분명히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터넷 설교는 아무래도 내가 골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입맛에 맛춘 나의 설교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좋은 습관은 아닙니다. 그 분의 설교가 참 좋아도 자기를 위해 기도할 수 없는 목사님으로 현장감 없는 공중메체가 됩니다. 특식보다는 맛이 없지만 가정에서 만든 음식을 선호해야 하듯 자기 담임 목사의 설교를 맛이 없어도 잘 경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꼭 두 번 들어야 한다면 둘다 정성들여서 듣는 것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신경은 크리스챤들이 무엇을 믿느냐? 하는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1)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2)외아들 예수님을 믿습니다.
3)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4)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믿습니다.
도표설명: 지금까지 우리의 고백
 
1. 본디오 빌라도 이해
오늘 본문에 나온 빌라도라는 인물은 그가 총독으로 재임시에 예수님께 잘못된 재판으로 말미암아 결국 2000년동안 수없이 많은 크리스챤들의 입에 의해 나쁜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좀 해 봅시다.
예수님 당시 로마에는 황제가 있고 그 밑에 13명의 총독들이 있어서 식민지를 맡아서 황제를 대신하여 통치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식민지 마다 그나라 왕이 있기를 했지만(유다에는 헤롯) 그 왕은 로마 황제가 임명한 왕으로써 황제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만 하는 사람으로써 말하기로 하면 로버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로마에 속해있는 나라들의 왕은 참 정치를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첫째 로마에 세금을 달라고 하는 대로 내어야만 했고 둘째, 어떤 죄인에 대해서 재판을 할수는 있었으나 사형결정은 왕이 내릴수 없고 총독이 내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빌라도 역시 로마인으로써 주후26년에 유대 총독이 되어 10년간 재직을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성격이 잔인하면서도 유약하여 뇌물을 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자신은 분명히 예수님의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계속 소리 지르는 유대인들의 난동에 견디다 못해 세수대야에 물을 떠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민요를 두려워 그냥 끌려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2. 예수님에게 씌어진 죄목
당시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죄목을 걸고 재판에 회부 하였습니다.
첫째:백성을 미혹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군중들의 모임을 그들은 정치적인 모임으로 해석을 하고 예수께서 군중을 미혹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슨 현상이든지 다 정치로 봅니다.
둘째: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시 백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예수에게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질문 하기를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치지 않는것이 옳습니까?” 하고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에 바쳐야 한다고 하면 유대인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 손가락질을 받게되고 만약에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로마의 법을 거스리는 자로 만들어 버리려는 계획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게 한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확실한 대답을 하였는데(눅20:) 이들이 모함하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사실이 아닌 고소거리였습니다.
셋째:자칭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왕은 로마황제가 임명을 하는법인데 예수님이 자칭으로 왕이라고 했으니 고소의 제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18장36절이하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보고“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을때 “내 나라는 이세상에 속한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3. 빌라도의 재판 결과
 예수님의 재판은 4번이였습니다. 1)산헤드린 공회 2)빌라도 3)헤롯 4)빌라도
1)눅23:14 본문에 빌라도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세번씩이나 예수의 무죄를 선언 하였습니다.
그런데 16절에 때려서 놓겠노라 고 하였습니다. 제가 좀 불만인 것은 죄가 없으면 무죄이며, 무죄이면 석방인데 왜 때리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러 백성에게 만족을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지금 빌라도가 지배하고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든 백성들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메시야 시대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문서로 현재 터어키의 성 소피아 사원에 소장되어 있는 ’빌라도의 고백서‘ 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 각하에게 ---->
“각하에게 문안 드립니다 최근 수년동안에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너무나 독특한 일이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까지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대로 소상히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발생한 사건을 보면 모든 다른 신들과는 조화될 수 없는 일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발레리우스. 플라슈스를 계승하여 유대 총독이 된 날을 저주하고 싶을 정도 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직위를 인수하고 큰 연회를 베풀것을 명하고 갈릴리의 영주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그의 부하 직원들을 초청 하였습니다. (생략) 제가 통치하는 도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은 가장 다스리기 힘든 도시라고 여겨 집니다. 백성들은 매우 거칠어서 저 자신 순간순간마다. 폭동의 두려움에서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실제적인 판단 보다는 백성들의 고함소리에 응하고 말았습니다.
본문 23절에“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사형에 내어 주었습니다.
당시에 성중에서 민란과 살인을 하고 옥에 갇힌 바라바 라는 사람이 잇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습관에 명절이 되면 죄인 한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둘중에 누구를 놓을수 있느냐? 했더니 사람들이 소리 지르기를 ‘빌라도를 놓기로 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백성들의 소란으로 인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되었습니다.
흔히 한국에서 쓴는 말로 ‘목소리 큰^^이 이긴다’ 라는 말과 똑 같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4. 우리 신앙생활의 적용
1)예수님은 역사적인 사실의 인물이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창조---------BC/AD-----------현재
BC--Before Christ (예수이전)
AD--Anno Domini(Latin) (예수이후)
after death?-
In the year of our Lord
History- 그(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스토리
 
도표설명: 역사속에 오신 주님을 실증
 
19세기 전반 까지만 해도 예수의 역사성에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가지만 해도 예수가 훌륭한 도덕가인가? 아니면 신의 아들인가? 하는 문제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등장을 하자 곧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로마제국의 권한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동시에 그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통을 받은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며 동시의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허공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분명한 역사속에 고통을 받으시고 사형을 받으시기 까지 이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믿습니다.
2)예수님은 끝까지 인간이 걸어간 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인간적으로 볼때 안타깝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하고 억울 하기도 합니다.
처녀의 몸에서 나시고 그러한 무서운 시험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어째서 그까짓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의 고소로 빌라도에게 고통을 받으시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5,000명을 먹일수 있으신 능력의 예수님, 광풍이 불어 파도가 칠때 한마디 호령으로 잔잔해진 사건, 각종병자의 고침과 죽은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께서 어째서 그 보잘 것 없고 하나님도 섬기지 않는 이방인인 빌라도의 법정에서 그것도 부당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하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인간 모습 그대로 가지셨으니 우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성도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아픔과 고통과 고난을 천백번 이해하시고 우리의 삶에 위로자가 되시는 것을 믿으며 살아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3)우리는 고난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낙심이 아니라 오히려 지상의 권한보다 하나님의 권한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세계 통치와 인간 세계의 통치의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 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다스릴때 총칼과 법과 폭력과 술수를 최대한으로 사용 합니다. 그래서 약자를 누르고 고문을 가하고 중상 모략을 해서라도 권세를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은 원수가 생기게 되고 그리고 불안과 공포와 초조와 전쟁 비극이 끊일줄 모르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이와는 정 반대로 공의 와 자비로만 다스립니다. 우주와 세계와 인간사회에 삶의 질서를 만드시고 잘못을 범하였을때 회개와 재생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길이 참으시고 새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이 지상의 세계가 잠시 동안은 승리 하는것 같습니다. 로마제국 안에 있는 권한 그리고 그 아래있는 한 총독에 의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로마는 1000년을 즐겼다고 하지만 사실 그 세력은 불과 300 밖에 되지 못하였다고 역사가들은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는 인간의 세력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결국은 로마의 지배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이세상을 2000년 동안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수 없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이 예수를 지배 했다고 해도 결코 3일을 넘길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덤에 꼭 삼일만 계셨기 때문 입니다.
4)예수님의 고난의 길은 신자의 길을 미리 가르쳐준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교훈 하실때 눅13:24“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교회사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이 거룩한 발자취를 따라간 사람들에 의해 발전 되었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서 죽어가신 믿음의 선조들에 의해서 복음의 사역은 확장 되었고---
미국의 건국도 예수님을 따른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한국의 대원군과 일제의 악정 속에서 선교의 불꽃이 피어 한국교회의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네로황제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이 경기장으로 끌려가 맹수의 밥이 되면서도 찬송을 불렀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로마의 한 행정관은 굳굳히 믿음을 지키고 순교당하는 기독교인을 향해서 “저 미친 사람들을 보라” 고 하였는데 그 이후 역사가들은 이렇게 기록 합니다.
“그때 미친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네로황제였다”
                                                                                    할렐루야 아멘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사도신경 강해 4)
마1:18-25
스프링필드 중앙교회 11/6/11서 정 길 목사
서론/본문이해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교제를 하였지만 아직 아무 관계도 이루지 않은 상태이었습니다.
25절에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 하였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마리아가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나사렛을 방문해 보니 마리아와 요셉이 살던 집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 동네는 그리 큰 동네가 아니였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으니 이제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저 여자와 조용히 끊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에 “그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라는 것입니다.
24절에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 왔다”고 했습니다.
1.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이해
목회자는 건강해도 목회에 도움이 되고 몸에 병이 들어도 목회에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가지는 특수성이라고 생각 합니다.
지 지난 주일 저는 머리가 몹시 아팟었습니다. 주간 중에 파크에 걸으면서 옛날 하던대로 머리에 손을 얹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게 아픔의 번뇌를 주는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소리를 쳤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머리가 훨씬 가벼워 졌습니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또 머리가 아파옵니다.
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확신을 가지고 명령을 했더니 그때부터 머리가 약 1주간동안 아프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 나았다 보다 했더니 한주간이 지나서 또 머리가 또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그동안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부족했던 자신을 발견했고 좀더 겸손해 졌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느꼈던 것은 항상 주님께 기도를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기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사실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병이 치유되는 일을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통에 빠진 사람이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평화를 얻는 일은 더 더욱 귀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병원을 통해 병을 고치거나 혹 신앙으로, 또 기도로 병을 고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우리가 병이 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그분께 나의 모든 생애를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성경에 욥은 아무 이유없이 재산을 잃고 또 몸이 거의 만신창이가 되도록 아픈 고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하면서 절규하였습니다. 그런데 고통의 여정을 통과하면서 시간이 흐른 다음, 어느 단계에서 회복이 이루어 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회복함에 있어서 그의 치유에는 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욥의 고통이 이루어지는 과정중에 욥기의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통속에서 “내가 이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들어 알고 있고 믿고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눈으로 봅니다”가 가장 큰 핵심이 되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그 사건을 통해서 사람에게 병이 나았다 낫지 않았다 하는 문제는 두 번째가 되고 제일 중심은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주님은 결코 어떤 상황일지라도 나를 버리시지 않으신다” 고 하는 그 확신입니다.
그 확신 중에 사는 동안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잊지않으시고 아픔의 현장에서 건저 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의 사람이 작은 고통이든, 큰 고통이든 그 고통에서 다시 회복해서 주님을 의지하며,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 재산을 되찾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그런 일은 모두다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집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서 치료를 받는 것은 정상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기도해서 성령의 역사로 치료를 받았다고 하면 그 일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어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바탕에서만 아니라 비 합리적인 것 같아 보이고 또 비과학적인 것 같은 사건속에서도 얼마든지 현실을 변화 시키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2.동정녀 탄생을 바르게 보는 관점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는 사실을 인간적인 각도에서 보면 절대로 해결 되지 않습니다.
사건을 일으킨 하나님 편에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주동된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들은 이 사건을 비 과학적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비과학적이 아니라 초과학적인 사건입니다.
사실 일찍이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고 무에서 유를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고백 하였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다음 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권을 이미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백을 진실로 바로 한 사람은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믿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으로의 잉태’ 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바탕이 있는냐?~~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제가 20초반에 부산에 살때에 하루는 어떤 제 친구 사무실에 놀러 갔었습니다. 친구와 같이 대화를 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려서 문을 열어보니 어떤 신사 한 분이 들어와서 대화를 같이 하고자 합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전도자였습니다. 그것을 알아채린 제 친구가 먼저 말하기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처녀가 혼자 아이를 낳았다는 성경 이야기를 믿으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저는 그 말을 받아서 “나는 그것이 의심되지 않거든요. 이것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 “그게 바로 선택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동정녀 탄생에 대한 것을 설명하려고 애 쓰지만 저는 사실 의심의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냥 믿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중의 은혜라고 생각 합니다.
저에게 왜 의심이 없는가 하면, 하나님의 신뢰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혹시 여러분 중에 처녀탄생, 물위로 걸으시는 예수, 홍해 갈라지는 사건, 노아 홍수 사건 등등이 믿어지지 않고 의심이 생기면 억지로 믿으려고 애쓰시지 마시고 의심의 과정이라는 틈사이를 넘어서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은 내가 철저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먼저 마음 중심에 먼저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의심이 안개걷히듯 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의심이라는 그릇이 확신이라는 모습으로 둔갑되는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3.중보자의 필요성과 자격
1)성령으로 잉태 되어야 할 그 필요성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 되어야 할 이유를 살펴 봅시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 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의 혈통으로 태어 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혈통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고 마리아의 몸만 빌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를 숭배할 아무 필요도 우리는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은 남녀 양성의 생리적인 결합에 의하여 출생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야 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저도 가끔 중매를 합니다만 제일 잘 되는 중매가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양쪽을 내가 잘 알 때입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주례를 요청해서 거절 한 적이 한번 있습니다. 제가 얼굴도 보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되면 중매가 좀 쉽고 주례도 가능 합니다. 그러나 전혀 보지 않은 사람을 중매 하기란 참 힘이 듭니다. 양쪽을 충분이 이해 할뿐 아니라 양쪽의 성품을 지녀야만 중보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람은 어떻습니까?
옳습니다. 인간은 이미 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마13:38-마귀의 자녀
눅19:10 잃어 버린자
엡2:2-불순종의 아들들
엡2:3-진노의 자녀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의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아무리 하드웨어가 좋아도 손상된 cd나 chip은 컴퓨터를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가 없습니다. 회사에서 새로 만들어진 깨끗한 것이라야 프로그램을 진행 시켜 나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땅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조상 아담으로 인하여 손상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하였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혈통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직접 잉태 되어야만 했습니다.
2)성령으로 잉태 되어야 중보자의 자격이 됩니다.
예수님이 중보자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렸으니 인간이고 성령으로 잉태 했으니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양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삼는 일에 매우 적절한 중매자인 것입니다.
딤전 2:5“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예수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예>월가 점령시위대들은 감추어진 경제 구조적인 악을 감추고 특권층 1%가 잘사는 비밀스런 사회를 열어서 함께 살자는 운동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내막을 은근히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고 나타내신 일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이 감추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들어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급기야, 돈으로도 안되고, 명예로도 안되고, 권세로도 안되고, 힘으로도 안되고, 인간의 선한 공로로도 안되는 인간구원의 문제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오심을 환영하고 마음에 영접 함으로 비밀이 열리고 근원적인 인간의 죄가 해결되는 일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지는 이러한 믿음은 단순한 신앙의 논리에 대해서 긍정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하는 이 일은 저와 여러분의 분초로 달라지는 삶의 현장에 면밀하게 능력을 얻는 힘이 됩니다.
언제 말입니까? 지금입니다.
지금 현재 이 자리에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역사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이러한 신앙고백이 그냥 주문을 외우는 정도가 아니고, 어떤 이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플 때, 괴로울 때, 마음이 외롭고 적적할 때, 화가 날 때, 여러분의 속에 계신 성령께서 생각나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더 나아가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세상 사람들이 계산해서 뽑아 낼수 없는 기이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합시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사도신경 강해 3)
요3:14-18,민21:4-9
스프링필드 중앙교회(성찬예식 있는 날) 10/30/11 서 정 길 목사
 
서론
오늘은 말틴 루터를 중심해서 천주교의 부패로부터 개혁되어 나온 종교개혁주일 494돌입니다. 개혁은 단순이 바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일입니다. 말씀 중심어여야 할 교회가 전통으로, 은혜 중심이어야 할 교회가 공로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할 교회가 마리아와 교황의 권위를 함께 공존하는 종교타락에 의해서 기독교가 창시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창시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가질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일이었다고 생각 됩니다. 저는 이 귀한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초점으로 말씀을 증거할 수 있어서 참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예>장님의 간증한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장님은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며 살았다가 나중에 예수 안에서 축복받고 새길을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인즉 ‘길거리에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수없이 사람이 많이 지나갑니다.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발자국소리에 귀가 아주 예민해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천히 걷고 어떤 사람은 빨리 걷는다. 한참 듣노라면 나중에는 발자국소리를 들으면 이사람은 직업이 무엇일것이다 라는 짐작까지 한다. 나중에는 발자국 소리를 통해서 동냥을 해줄 사람인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인지 알수 있었다. 보통 동냥을 하는 사람의 발자국소리는 천천히 일정한 박자로 걷는 사람보다 빨리 걷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돈을 던지는것이 아니라 총총걸음으로 걸어 자기앞을 지나친다. 그러다가 발을 멈춘다. 이 멈추는 소리가 두세 발자국 멀리서 나는데 그 사람은 틀림없이 다시 돌아와서 돈을 떨어 트린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체로 “흠- ” 하는 약간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무슨 소리 일까요 약간의 안도의 숨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알게도 모르게도 많이 죄를 짓게 되는데 그는 지금 장님에게 동전 한잎을 던지면서 그의 지은 죄를 다소 라도 사함 받았으리라는 기대의 한숨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안다. 내가 이렇게 수없이 많이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아픔을 주고 하는 많은 지은죄에 대해서 이 동냥이 과연 1000분지 일 정도 사해질지---’ 의심되는 일 말이다.
얼마나 인간이 죄에 민감하며 죄 의식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는지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이 장님거지의 경험대로 사람들은 미미하게 막연한 구원과 죄에 대한 용서를 상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용서와 구원은 상상이 아닙니다. 
1. 불신 (이세상)
 민21:4-9 까지 보면(수정캐기 지난 목요일, 27일자)
“이스라엘 백성, 그들은 에돔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산에서 부터 홍해길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길을 걷는 동안에 마음이 몹시 조급 하였습니다. 너무 먼길을 둘러서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것도 없다 마실것도 없다. 이 보잘것 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그러자
민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자가 많은지라.”
말씀대로 주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 뱀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 하였습니다.
민21: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 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하였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민수기 21:8-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땅의 모든 인류는 각자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 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에게 원망도 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4-1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독생자가 과연 누구입니까? 
2. 역사적 정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1)하나님 아들
2000년간 피를 흘려 가면서 하나님 아들에 대해서 논쟁을 해 왔습니다.
a.오리겐(Origenes, Adamantius 185-254)-유출설을 말합니다.-물통에 물이 많으면 넘쳐 흐른다. 그래서 온 우주가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 들어 왔다. 처음에 유출된 것이 예수님이고 그다음이 우주다.
b.아리우스(Arius 280-336)-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예수님은 피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가?
c.아다나시우스(Athanasios, Magnus 259-373)-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다.
그 이후 4세기 말 기원후 379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신학자 150명이 모여 교리를 확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모든 시간 이전에 독생 하시고 ---하나님으로 부터오신 하나님이시다” 로 결론 지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요13: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즉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시 한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하나님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육체를 가지지 않았지만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셔야 하므로 예수님을 통해 이땅에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2)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란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야란 원래 예수님 당시에 평민들이 쓰던아람어인데 해석은 “기름부음을 받은자”란 뜻으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고 불려졌습니다.
원래 ‘기름 부음을 받은자’는 구약에서 대제사장에게나 선지자나 왕에게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왕의 통치가 백성의 구원자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왕의 통치는 아무리 훌륭해도 부분적이 였고 나중에는 인류전체를 완전하게 구원할 자를 백성들이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왕일지라도 한시대에 조금 역할을 할뿐 영원한 구원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몇천년동안 기다려 오던이가 바로 메시야 입니다. 이 메시야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분 이여야 했고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 편에서 오셔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뜻을 모아 세워본 왕이나 예언자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완전하지 않았고 성품으로나 자격으로도 완전하지 않았고 다만 완전한 메시야는 하늘에서 보낸 자이어야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였습니다.
예>자동차에 물고기 모양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을 봅니다. 히스토리는 이러합니다. 초대교회에 로마의 핍박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끼리 서로 만납니다. 그럴때 그리스도인이라고 서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데 잘못하다가 붙잡히면 그대로 사형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끼리 서로암호를 주고 받은 것인데 그것을 물고기를 땅에다가 그리면 상대방이 그리스도인인줄 알고 예배장소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물고기안에 쓰여진 것은 헬라어 물고기를 표현하는 익크투스(Ichthus)인데 거기에는 다섯 글자의 헬라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첫글자는 I- 헬라어 예수, 2) X-그리스도 3) O-하나님 4) Y-아들 5) C- 구주
읽을때는 야소스(Yasous) 크리스토스(Christos) 데오(Theou) 히오스(Hyos) 소터(Soter)-(발음만 이렇게 됩니다.) 이 첫글자들을 붙여놓으면 ‘물고기’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 첫글자들의 하나하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주>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들에게 보내는 확실한 메시지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 는 것입니다.
3. 믿음
  아는 것 과  믿는 것
1. 하나님 G0d(창조주, 나는 피조물) yes
2. 죄 sin(아담의 원죄가 내 속에) yes
3. 구원 salvation의 길 (하나님의 계획) yes
4. 예수그리스도 Jesus (죄를 대속할 분) yes
5. 영벌eternal punishment(永罰)과 영생eternal life(永生) yes
   (믿음으로 천국, 불신지옥)
 1)복음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을 바로, 그리고 많이 아는 것으로 출발된다. 물론 많이 안다고 해서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복음의 메세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수가 없습니다. 그 기본적인 메세지가 무엇입니까?
가.하나님을 아는것입니다.
나.죄를 아는것입니다.
다.구원을 아는 것입니다.
라.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마.영벌과 영생(즉 천국과 지옥)을 아는 것입니다.
예>영화 이기풍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기풍이가 원래싸움을 좋아하고 술 좋아하였던 사람인데 1890년 평양 서문통 네거리에 웬 눈이 파란 사람이 전도하니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짓 한다고 돌을 던져서 턱에 피가 흘렀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하지않고 보기에 이상하다고 그 짓을 했습니다. 나중에 한국 사람한테 전도받고 변화받아 마펫선교사를 찾아가서 사과를 하고 가장 힘든 제주도에 선교사로 지원하여 갔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게 된 이유
가.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므로써 온세상을 엿세동안 창조 하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지었습니다.
나.그런데 그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그만 범죄에 빠지게 되어 모든 인류가 범죄한 백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다.그러나 하나님은 또 인간을 사랑하시사 많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율법을 지키지를 못했고 그 율법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아는 것으로 교만하고 말았습니다.
라. 하나님은 또 인간을 사랑하시사 선지자들을 보내사 백성들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촉구 하였으나 인간은 그 예언자를 때리고 죽였습니다.
  마. 하나님은 또 다시 인간을 사랑하시사 마지막으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습니다.
2)믿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다.
그래서 그를 믿는자마다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죄를 깨끗이 씻고 용서함을 받고 영생얻도록 하였습니다.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요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10: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 가리라 하시니라.”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 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이름 예수!
그를 알고,
그를 처다보고,
그를 마음에 믿고,
어떤 모양으로든 그를 통해 경험되어질 때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약속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목양컬럼 11월

 
/                               국제 해비타트 이야기(퍼와서 정리)
밀러드 풀러(Millard Dean Fuller, 1935 1 3-2009 2 3)는 앨라배마 주 래닛(Lanett)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3살 때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그가 6살 때 재혼을 합니다. 그래서 풀러는 이복 남동생 두 명이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일 외에는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는 오번 대학교(Auburn University)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앨라배마 대학교(University of Alabama)에서 법학으로 학위를 받습니다. 그의 나이24세때(1959) 린다 콜드웰(Linda Caldwell)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풀러는 학교를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약하며, 벤처 사업을 하여 이십대 후반인 29살에 백만장자가 됩니다. 풀러는 열심히 일하여 재벌이 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되었고, 가정을 올바로 돌보지 못해 아내와 갈등이 생깁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는 그는 아내와 화해를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재 헌신 합니다.
그 후 풀러와 아내 린다는 그들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웃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새로운 삶을 위해 준비하게 됩니다. 그들은 조지아 주의 어메리쿠스(Americus) 근처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인 코이노니아 농장(Koinonia Farm)으로 가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립니다.
코이노니아 농장은 1942년 클레렌스 조단(Clarence Jordan)에 의해 시작이 되었는데 풀러 가족은 그 곳에서 5년 동안 살면서 여러 가지 사역과 함께 집짓는 일을 배웁니다.
풀러는 신명기 15 7-8절을 묵상하며 새로운 비전을 받게 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그래서 풀러 부부와 그의 네 자녀는 1973년 교회를 통해 아프리카 자이레(오늘날 콩고)에 선교사로 갑니다. 그곳에서 풀러는 자이레 서쪽에 있는 만다카(Mandaka) 마을의 극빈자들을 위해 집짓는 사역을 시작합니다. 얼마 후 만다카 마을은 진흙과 짚으로 지어 위태하던 집들이 벽돌 집으로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100채의 집짓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풀러는 새로운 꿈을 꿉니다. 1976, 그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국제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 International)를 창설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나는 인생은 선물이며 책임이라고 본다. 나의 책임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어려움에 처해 있는 그분의 백성들을 돕는데 사용하는 것이다”(I see life as both a gift and a responsibility. My responsibility is to use what God has given me to help his people in need.)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비전에 따라 세워진 국제해비타트의 사랑의 집짓기 운동은 점점 확산이 됩니다. 풀러는 1984년에 조지아 출신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초청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의 도움으로 더 많은 재정과 봉사자가 모였습니다. 해피타트 운동은 더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2003년까지 92개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150,000채의 집이 완성됩니다. 풀러는 10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50개 이상의 상을 받게 됩니다. 1996, 그는 미국 시민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대통령상 자유의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타게 됩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메달을 증여할 당시 그를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미국과 전 세계 인류를 위해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꿈을 실현해 주기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밀러드 풀러가 박애정신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평생 자원봉사자들의 노력과 기부를 통해 전 세계 150만여 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30만 채가 넘는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원대한 꿈이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소유할 수 있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풀러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살게 했습니다.
이번12 11일 주일에 있을 우리교회 폭력 피해여성들에게 음식제공하는 작은 사역은 하나님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며 우리의 삶에 보람을 가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권석균 목사님의 글을 정리 하였음을 밝힙니다>  11-27-11 여러분의 목사 서정길



 
                                    어디에서 등을 부비 실래요?
말틴부버(Martin Buber 1878-1965 유대인 종교 철학자) 는 그의 책 “나와 너”(Ich und Du)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학적 발달과 지식의 풍요로 말미암아 현대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와 너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나와 그것의 관계만 이루어 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 관계의 근원은 나와 너의 관계이다. 그것은 객관적이며 대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전 인격적인 관계이다. 원래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서 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라는 상호적인 관계가 있어야 비로소 내가 있는 것이다.
이민생활은 참 외롭습니다. 각종 나라사람들이 모여서 한 도시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가 관계하는 사람은 고작해야 몇몇 한인들입니다. 부득이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고 보니 모든 일에 내가 편할대로 내 성향에 맞는대로 행동하다가 보면 각기 다른 사람 다른 성향들이 만나고 부딪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리 마음 상하고 저리 마음상해서 더 이상 보고 싶지않은 사람들을 다 제하고 나면 정말 몇몇 사람만이 내 주위에 남아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 남아있는 몇몇 사람과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그 친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한인들 마음 깊은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훈계서인 랍비문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거지가 하루는 랍비의 담벼락에 등을 비비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랍비는 불쌍히 여겨서 안으로 불러들여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혀 주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들은 어떤 부부 거지가 역시 같은 장소에서 담벼락에 등을 부벼 대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것을 본 랍비는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때려서 내어 쫓았습니다. 그 부부거지들은 대우가 공평치 않다고 항의를 하자 그 부부에게 랍비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지난번 거지는 혼자 였으니까 담에 등을 부빌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나 너희들은 둘이 아닌가 그것도 아주 가까운 부부가 아닌가 등이 가려우면 서로 긁어줄 것이지 남의 담장을 부비는 것은 옳지 않다”
, 서로의 가려운 데를 긁어 준다는 것, 이것은 비단 부부관계에서만 한정 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고 받은 일에 취약하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한정된 한인사회 속에서 우리는 각자마다 가려운 등을 부빌곳이 필요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말틴 부버의 이야기는 결국 무인도에 혼자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존재요 동시에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의 관계성을 무시 한다면 결국 그것역시 무인도에 사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등을 부빌곳이 있습니까? 나를 중심해서 나의 필요에 의해서만 시작되고 끝을 내는 인간관계 일때에 나와 너의 관계는 없어지고 나와 그것의 관계가 판을 치게 되고 급기야는 서운함을 안고 돌아서는 경우를 지적한 것입니다.
나의 성향을 뒤로하고 상대방의 성향을 읽으며 응하려고 하여 나와 너의 관계가 돈독 해 지고 풍성해 진다면 그 많큼 그 공동체의 삶이 풍성해 지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 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 하노라”
                                                                                                         -1:3-6-
                                                                            11-20-11 여러분의 목사 서정길


 
목양컬럼/                            감사 할 줄 아세요?

다이에나 황태자비는 재물도 많고 키도 컸고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자였지만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사실에만 집중해서 가진 것에 대해 '감사' 할 줄 몰랐으므로 불행한 여인으로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남게 되었습니다.

1963년 서울에서 한 귀여운 아이가 태어 났습니다. 그런데 태어나면서 뇌성마비 장애를 가졌습니다. 이름은 송명희, 그녀는 11세에 독학을 하여 한글을 배웠고 17세에 하나님을 만나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 후에 약 4년간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하루 5시간 기도와삼십여번의 성경 통독으로 주님의 인도 하심을 받아 시()를 썻씁니다. 그녀는 1985 5월에 시집과 간증집을 내었는데 한국 기독교 저작 최우수 도서상을 받았고 한국 복음성가 작사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그후에 스물네권의 책과 찬양 100여곡이상이 발표 되었습니다. 송명희 씨는 뇌성마비를 앓고 있으므로 말미암아 자신이 아무것도 할수 없는 형편에 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찬양을 작시하였습니다. 그녀의 대표적 작품은 "나 가진것이 없어도"입니다. "나 가진 것이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이 있는 건강 없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녀는 뇌성마비를 앓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수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각을 적을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 돌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현재 마지막 꿈을 꾸고 있는데 장애인 예술학교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또 이런글을 적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는 행복 대신
보이지 않는 미래,
안개 속에 가려진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향해
바쁘게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돌아볼 틈 없이
현재의 시간을 미래에 담보 잡혀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오늘, 지금 이 순간 이외에
다음 시간을 보장 받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외에
우리의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 감사하십시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 이 순간.
지금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 하리로다" - 3:17-18-




                                                                       11-13-11 여러분의 목사 서정길


목양컬럼/                             의심이라는 공간에서 부터
소설<The Blood of The Lamb /어린양의 보혈>이라는 책에서 원더 호프라는 사람은 백혈병을 앓고 있는 열한 살 짜리 소녀 아이의 아버지였다. 소녀는 정성어린 치료에 의해서 골수가 생성되고 조금씩 회복 되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만 병실의 병원균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딸의 이름을 새긴 케이크를 사들고 왔던 원더 호프는 병원을 나와서 딸의 회복을 위해 항상 기도해 왔던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교회 앞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향해 케이크를 던졌다. 케이크는 가시 면류관 바로 밑에 떨어졌고 형형색색의 크림이 예수님의 얼굴 위에서 흘러 내렸다
, 이 이야기를 들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가? 동정과 아쉬움을 동시에 가져 볼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들도 때로는 신앙이 있다고 자부 하다가도 어떤 어려움 당하면 곧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서 의심하고 만다. 아니 우리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던 제자들과 당시 예수님의 주변의 사람들도 그러 하였다. 52어의 기적으로 3000 5000명을 먹이실 때에는 수많은 군중이 따라 다녔지만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게 될 그때에는 여인 몇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한사람 한사람 그 자리(제자 공동체)를 빠져 나갔다. 그럴 때 예수님은 애처럽게 제자들에게 물으셨다.“너희도 가려느냐”(6:67)
이 세상에는 물론 ‘의심’이라는 단어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 그런데 성경에 도마라는 사람은 ‘의심’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신앙의 싹을 트게 한 사람이다. 사실은 베드로도 예수님을 저주했고 가롯유다는 아예 예수님을 배신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의심의 공간을 어떻게 사용 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믿음이란 어떤 ‘확신’에서 시작한다고 믿고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과 주님을 “영접합니다.(1:12)하는 고백에서 믿음은 비로소 출발 한다. 그런데 그 믿음이 순식간에 자신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시때때로 불청객인 ‘의심’이라는 녀석이 내 속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두말 할 것 없이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곧 믿음의 고개는 자라의 머리처럼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믿음은 바로 이 의심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다시 자라날수가 있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 보면 믿음은 우리가 기대했던 곳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이나 칼빈의 5대교리를 외웠기 때문에 신앙이 자라나고 있는가? 물론 그럴수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심의 공간을 잘 들여다 보고 거기에 물을 주면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뿌리에서 새싹이 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그 힘든 상황과 거기로부터 생성되는 ‘의심’이라는 그 자리를 결코 그냥 무시하지 말고 그 안에 믿음의 티끌을 찾아 물 조리개로 성령과 기도의 물을 부어 보라 그렇다면 그 의심속에 감추어진 티끌같은 믿음에서 커다란 확신과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의심이라는 공간에 숨어있는 골격을 그냥 음지(陰地)에 두지말고 밝은 장소로 이끌어 내어보라.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내어놓고 긍휼을 기대해 보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외면하시지 아니하실 것이다. 사실 몇몇 적지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의심’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확신을 이끌어 낸 경험을 가지게 된 사실도 많다. 의심했던 도마는 나중에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20:28)이라고 고백했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도망했던 베드로도 닭이 울 때 자신이 통곡을 하였다.(22:62)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나는 일주일 이상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히 떠난적이 있었다”고 고백한 후에 자신속에 감추어져 있는 믿음을 찾아냈고 우리는 많은 의심 가운데 신앙적인 방황을 경험한 신앙인들의 History에서 고귀한 믿음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 처럼 이렇게 고백하여야 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9:24)
                                                                            11-6-11 여러분의 목사  서정길

목양컬럼/                             변질(Degeneration)과 변화(Change)
1년중 미국사람들의 큰 파티의 첫째는 슈퍼볼 이후이고 둘째는 새해이브 즉1231일이고 셋째가 할로윈 데이(1031)라고 합니다. 금년(2011)에도 이 시즌이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시장이 활발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이 할로윈 데이 유래는 지금의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의 유럽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해마다 11 1일은 수확의 계절이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날인데 이 날을 죽음의 날로 생각하였습니다.
사실은 천주교회에서 835년에 로마교황이 11 1일을 성자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영어로는 All Saints Day 혹은 All Hallow's Day입니다. 그런데 이 성자들의 날 전날을 이브의 날이라고 해서 Hallow's Evening 이 할로윈(Halloween)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날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변질 시켜 나간 것입니다. 당시 드루이드교가 있었는데 이들은 1031일 저녁에 죽었던 자들의 혼이 이전에 살던 자기 들의 집으로 돌아 온다고 믿었습니다. 이날이 오면 사람들은 귀신을 쫓는 방편으로 첫째 귀신이 자기의 집으로 오기전에 미리 귀신의 복장을 하여서 귀신이 다른 집으로 가도록 속이는 방법 Trick(계략, 속임수)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귀신에게 음식을 대접함으로서 Treat(대우,예우) 하므로써 귀신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이 기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캔디를 얻기 위해 이웃집을 방문하는 놀이를 trick 혹은 treat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미국인들의 문화와 습관속에 뛰어 들어와서 사회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하여 부모들은 변질된 종교의식이 문화로 덮혀져 있는 현실도 모르는채 이 어린이들에게 미신적이고 잘못된 영혼에 대한 이해를 심어주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지난 월요일 저녁 불을 켜놓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약10팀trick 으로 방문한 어린이들을 맞이하면서 그들에게 사과(캔디보다 이를 덜 상하게 하는)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내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심어주는 적당한 전도지를 만들어서 함께 줄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루터는 1483 11 10일 독일 아이스 레벤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 났습니다. 부모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써 아버지는 성격이 완고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경건한 일반 가정과 마찬 가지로 그의 부모에게서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배우고 외웠습니다. 1505년 루터의 나이 21세 되던때에 초여름 휴가로 귀향 하다가 도중에서 갑자기 하늘의 우뢰 소리와 천둥과 번개불과 소낙비가 억수로 쏫아질 때 그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죽음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순간 그는 하나님께 수도사가 되기로 서약을 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날마다 일곱 번 기도시간을 가지며 성경을 읽고 성가를 부르며 영의 세계를 명상하며 세상의 정욕에서 해방 되기를 기원 하였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토록 갈구하던 깨끗한 생활이 이 수도원 안에서도 발견할수 없음을 고민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학을 연구해서 신학박사도 되고 철학도 공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무지 그 가운데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점점더 큰 회의에 빠졌습니다.
당시 중세 카톨릭은 부패가 심각했었습니다. 카톨릭의 부패의 첫째는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여러분 이 면죄부를 받고 여러분의 돈이 이 괴 속으로 들어가 땡그랑 소리가 나는 순간 저 가옆은 여러분의 영혼들이 연옥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고 그것이 신앙의 본질인양 변질된 복음이 판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카톨릭의 부패의 둘째는 그들의 공적사상이었습니다. 그는 속죄를 위해 제단으로 올라가는데 로마의 빌라도 계단을 무릅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루터는 규례에 따라 한계단을 오르고 계단에 입을 맞추고 한계단을 오르고 계단에 입을 맞추고 하면서 그의 가슴속에는 변질된 복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때 부터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인데 이러한 엄격하고 틀에 짜인 고행의 길이 과연 인간이 구원받는 일에 무슨 도움이 되는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그가 마지막 계단에 이르러서는 한숨을 크게 쉬면서 롬1:17하반절을 크게 외쳤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래서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주장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대학(Wittenberg University) 교회문에 붙인 사건이 있었던 1517 10 31일을 종교 개혁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변질을, 말틴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은 변질되어 가는 카톨릭의 믿음에서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자신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불러잃으키기 위해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각종 시험과 본능적 욕구들을 모두 성령의 불로 소멸하고 최초 신앙의 시작이었던 초대교회 사도적 전승을 면면히 이어가는 교회(스프링필드 중앙교회)가 되도록 노력 합시다
                                                                         10-30-11 여러분의 목사 서정길